역사

[신라] 36대 혜공왕(惠恭王)

[悠悠自適] 2025. 4. 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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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6대 혜공왕(惠恭王)
출생 758년 9월 ~ 780년 4월
재위 765년 6월 ~ 780년 4월(14년 10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없음

생애
혜공왕의 이름은 건운(乾運)으로 경덕왕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김씨로 만월부인(滿月夫人)으로 서불한 의충의 딸이다. 
765년 6월, 경덕왕이 사망하자 신라 36대 왕에 즉위했다.
왕위 즉위했을 때 8살이어서 태후께서 섭정했고, 대사면을 했다. 
대학에 행차하여 박사에게 명해 상서(尙書)를 강의하게 했다. 

766년(재위 2년) 정월,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왔고, 대사면을 하였다. 
2월,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 양리공(良里公)의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5개였고 하나는 위로 향했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의 땅이 함몰(陷沒)되어 연못이 되었다. 
세로 가로 50여 척이고 물색은 푸르고 검은색이었다.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북소리 같았다.

767년(재위 3년) 6월, 지진이 발생했고, 7월에는 이찬 김은거(金隱居)를 보내 당 조공 거듭하여 책봉을 더해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자신전(紫宸殿)에서 연회를 베풀며 사신을 접견했다. 
별 세 개가 왕궁의 뜰에 떨어져서 서로 부딪혔는데, 그 빛이 마치 불꽃처럼 솟아났다가 흩어졌다. 
9월, 김포현(金浦縣, 지금 김포시) 벼 종자가 모두 쌀이 되었다.

768년(재위 ​4년) 봄,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당 대종(代宗)이 창부낭중(倉部郎中) 귀숭경(歸崇敬)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하게 하고 부절과 책봉 조서를 지니고 신라로 파견하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겸하여 왕의 모친 김씨를 대비로 책봉했다. 
5월, 사형 이하의 죄를 특별히 사면했다. 

6월, 도읍에 천둥과 우박으로 풀과 나무가 해를 입었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고 지진의 소리가 마치 천둥과 같았다. 
샘과 우물물이 모두 말랐고 호랑이가 궁 안으로 들어왔다.  
7월, 일길찬 대공(大恭)​이 아우 이찬 대렴(大廉)과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왕궁을 33일 동안 포위했다. 
왕의 군대가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였으며 구족을 주살했다.
10월, 이찬 신유(神猷)를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김은거를 시중으로 삼았다.

각간(角干) 대공(大恭) 배나무 위에 참새가 모였는데 셀 수가 없었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에 이르는 말에 의거하면 '천하에 전쟁으로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이때 대사면령을 내려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했다.
7월 23일 각간 대공이 역적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왕도 및 5도(五道)의 주와 현 모두 각간 96명이 서로 싸워 크게 혼란스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안이 망하고 그 집안의 재산, 보물, 비단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에 화재가 나 불태워져 역적의 무리의 보물과 곡식이 사량(沙梁)과 모량(牟梁) 등의 마을 안에 있었는데 그것 역시도 왕궁 안으로 옮겼다. 
반란은 3달 동안 계속되다가 비로소 멈추었고 상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으며 죽은 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표훈대덕(表訓大德)이 말했던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이 이것이다.

769년(재위 5년) 3월, 임해전(臨海殿)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5월, 황충이 일고 가뭄이 들었다. 
백관들에게 명하여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했다.
11월, 치악현(雉岳縣)에서 쥐 8천 마리 정도가 평양으로 향했고, 눈이 오지 않았다.

​770년(재위 6년) 정월, 왕이 서원경(西原京, 청주)에 행차해 지나가는 주와 현에 옥에 있는 죄수들을 사면했다.    
3월, 흙비가 왔고, 4월에는 왕이 서원경에서 돌아왔다. 
5월 11일, 혜성이 오거성(五車星) 북쪽에서 나와 6월 12일에 이르러 소멸되었다. 
29일, 호랑이가 집사성(執事省)에 들어와 잡아 죽였다. 
8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했다. 
11월, 도읍에 지진 12월 시중 은거가 퇴직하여 이찬 정문(正門)을 시중으로 삼았다.

772년(재위 8년), 이찬 김표석(金標石)을 당에 보내 신년하례하고, 당 대종이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으로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773년 4월, 금, 은, 우황, 어아주, 조하주 등을 당나라에 조공했다.
6월, 당에 사은사를 보냈고, 대종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접견했다.
774년 9월, 이찬 양상(良相, 37대 선덕왕)을 상대등으로 제수했다.
10월, 당에 신년하례했고, 연영전(延英殿)에서 접견하고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에 제수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775년(재위 ​11년) 3월, 이찬 김순(金順)을 시중으로 삼았다.
6월, 이찬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8월,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이 함께 모반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776년(재위 12년) 정월, 하교하여 백관들의 관직명을 모두 다 예전 이름으로 복구했다.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를 바라보며 제사지냈다. 
2월, 국학에 행차하여 강의를 들었다.
3월, 창부에 사(史) 8명을 증원했다.

​777년(재위 13년) 3월, 도읍에 지진이 났다.
4월, 또 지진이 났고, 상대등 양상이 상소문을 올려 현시대 정치에 대하여 극렬하게 간언했다. 
10월, 이찬 주원(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779년 3월, 도읍에 지진으로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태백성(太白星)이 달로 들어갔고,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

780년(재위 16년) 정월, 누런 안개가 끼었고, 2월에는 흙비가 내렸다.  
왕이 어려서 즉위했고 장성(壯盛)하자 풍류와 여색에 빠져 음란했다. 
법도가 없이 돌아다니며 놀아 법과 풍속이 문란(紊亂)해졌다.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나 백성들의 인심이 돌아서서 국가의 사직이 아주 위태로웠다.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모아 궁궐을 포위하고 범했다. 

​4월,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敬信, 38대 원성왕)과 함께 거병하여 지정 등의 무리를 죽였고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 살해되었다. 
양상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惠恭)이라 했다. 
왕의 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로 이찬 유성(維誠)의 딸이고 둘째 왕비는 이찬 김장(金璋)의 딸인데 역사서에 입궁한 연도와 달이 빠져 있다.

가족관계(혜공왕 가계도)

· 신보왕후
이찬 유성(維誠)의 딸. 혜공왕이 살해될때 함께 살해되었다.

· 창장부인
이찬 김장(金璋)의 딸. 혜공왕이 살해될때 함께 살해되었다.

주요사건
· 여러 반란과 혜공왕의 최후
혜공왕은 재위중에 반란이 많았다.
결국 혜공왕은 780년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일으킨 반란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768년 7월, 일길찬 대공(大恭)​이 아우 이찬 대렴(大廉)과 반란을 일으켰다.
770년 8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
775년 6월, 이찬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8월,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이 함께 모반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780년(재위 16년) 정월,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다.
​4월,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경신(敬信, 38대 원성왕)과 함께 거병하여 지정 등의 무리를 죽였고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 살해되었다.

혜공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혜공왕은 어린나라에 즉위해서 모후인 경수왕후가 섭정했다.
하지만 재위기간내내 천재지변과 반란에 의해 국정은 어지러웠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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