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

[悠悠自適] 2025. 5. 1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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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
출생 846년 ~ 875년 7월
재위 861년 1월 ~ 875년 7월(14년 6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3남1녀

생애
경문왕의 이름은 응렴(膺廉), 응(膺)은 의(疑)라고도 하고, 43대 희강왕의 아들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이자, 47대 헌안왕의 사위이다.
모친은 광화부인(光和夫人) 또는 광의(光義)이고, 왕비는 김씨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3월, 왕이 무평문(武平門)에 거둥(擧動)하여 대사면령을 내렸다.

862년(재위 ​2년) 정월, 이찬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위진(魏珍)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8월, 당에 사신으로 갔던 아찬 부량(富良) 등의 일행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

863년(재위 ​3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 이하에게 명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도록 하였고, 차등을 두어 재물을 하사했다.  
10월, 복숭아와 자두꽃이 피다.
11월, 눈이 내리지 않았고, 왕비 영화부인의 동생을 둘째 왕비로 맞이했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왕이 흥륜사에 스님에게 묻길 "스님께서 일전에 말한 바 있는 세 가지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스님이 대답하길 "당시에 왕과 왕비께서 그 뜻한 것처럼 되어 기뻐하시며 총애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졌으니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로 인해 이처럼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두 번째이고 마침내 지난날 원했던 막내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세 번째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864년(재위 ​4년) 2월, 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다.
4월, 일본국 사신이 도착했다.
865년 4월, 당 의종(懿宗)이 사신으로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 어사중승(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와 부사(副使)로 광록주부(光祿主簿) 겸 감찰어사(監察御使) 배광(裴光)을 보내 선왕을 조문하고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아울러 부의로 비단 천 필을 주었다.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로 책봉했다. 

거듭하여 왕에게 교지 한 통, 의장(儀仗) 깃발 한 벌, 비단 500 필, 의관 두 벌, 금은 그릇 7개를 하사했고 왕비에게는 비단 50 필, 의관 한 벌, 은그릇 2개를 하사했으며 왕태자에게 비단 40 필, 의관 한 벌, 은그릇 1개를 하사했다. 
대재상에게 비단 30 필, 의관 한 벌, 은그릇 1개를 하사했고 
다음 재상에게는 비단 20 필, 의관 한 벌, 은그릇 1개를 하사했다.

866년(재위 ​6년) 정월, 왕의 돌아가신 부친을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모친 박씨 광화부인(光和夫人)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부인 김씨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왕자 정(晸)을 왕태자로 삼아 각각 봉했다.  
15일,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회(燃燈會)에 참관하고 아울러 여러 신료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0월, 이찬 윤흥(允興)과 그의 아우 숙흥(叔興)과 계흥(季興) 등이 역모를 꾀하다 일이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으로 도주했는데, 왕이 명하여 그들을 뒤쫓아가서 잡아 목을 베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일족을 멸했다.

867년(재위 ​7년) 정월,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했다.  
5월, 도읍에 전염병이 돌았고, 8월에는 홍수로 곡식이 여물지 못했다.  
10월, 사신을 각 지역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을 위로했고, 12월에는 객성이 태백성을 범했다.

868년(재위 ​8년) 정월, 이찬 김예(金銳)와 김현(金鉉) 등이 모반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고, 8월에는 조원전(朝元殿)을 중수했다.
869년 7월, 왕자인 소판 김윤(金胤)을 당에 보내 사은했다. 
또 학생 이동(李同) 등 3명을 진봉사(進奉使) 김윤을 따라서 당으로 보내 학업을 익히게 하고, 아울러 서책 구입하도록 은 3백 냥을 하사했다.

870년(재위 10년) 2월, 사찬 김인(金因)을 당으로 보내 숙위케 했다.  
4월, 도읍에 지진에 발생했고, 5월에는 왕비께서 돌아가셨다.     
7월, 홍수가 났고, 겨울에는 눈이 오지 않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871년(재위 ​11년) 정월,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황룡사 탑을 고쳐 짓게 했다.
2월, 월상루(月上樓)를 중수했다.
872년 2월,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고, 4월에는 도읍에 지진이 발생했다.
8월, 나라 안 주와 군에 황충이 일어 곡식을 해쳤다.

873년(재위 ​13년) 봄, 기근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또 전염병이 돌아 왕이 사신을 보내 구휼하게 했다.  
9월, 황룡사 탑이 완성되었는데, 9층에 높이가 22장이다.

874년(재위 ​14년) 정월, 상대등 김정이 죽어 시중 위진을 상대등으로 삼고 인흥(藺興)을 시중으로 삼았다.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다.
5월, 이찬 근종(近宗) 역모를 꾀하여 궁궐을 침범했는데 금군(禁軍)을 내어 그들을 격파했다. 
근종과 그 무리들은 밤에 월성 밖으로 나갔으나 그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다.  
9월, 월정당(月正堂)을 중수했다.  
최치원(崔致遠)이 당에 있으면서 과거에 급제했다. 

875년(재위 ​15년) 2월, 도읍과 나라 동쪽에 지진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 20일이 지나 비로소 소멸했다.   
5월 왕궁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고, 잠시 있다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였다가 날아갔다.  
7월 8일,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가족관계(경문왕 가계도)

· 문의왕후 김씨
47대 헌안왕의 장녀. 
860년 경문왕과 결혼하였고, 866년에 시호를 받아 문의왕후로 봉해졌으며, 870년 5월에 사망하였다.

· 정
경문왕의 장남. 49대 헌강왕편 참고.

· 황
경문왕의 차남. 50대 정강왕편 참고.

· 윤
경문왕의 3남. 왕자의 신분으로 소판 벼슬을 받아 당나라에 진봉사신으로 다녀옴.

· 만
경문왕의 딸. 51대 진성여왕편 참고.

· 후비 김씨
47대 헌안왕의 차녀. 863년에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주요사건
· 여러 반란과 황룡사 9층 목탑 건축
경문왕은 선왕인 헌안왕의 사위로, 860년 15세에 5살 많은 헌안왕의 장녀인 문의왕후와 결혼하였고, 다음해에 왕이 되었다.
그래서 즉위후 헌안왕 세력이 조정을 장악했던 모양이다.
​이는 866년(재위 ​6년)에서야 부친과 모친을 시호를 내리고 봉호를 추존한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같은해 10월, 이찬 윤흥과 그의 아우 숙흥, 계흥등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단적 조치를 하였다.
또, 1년 3개월 후인 868년 1월에 이찬 김예, 김헌등이 또다시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6년후인 874년 5월, 이찬 근종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근종의 난은 경문왕이 무리하게 황룡사 탑을 개축하는 공사때문이었다.
황룡사 탑은 868년 6월에 벼락을 맞아 무너졌고, 3년뒤인 871년에 경문왕이 개축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지진과 홍수, 가뭄등 재해로 배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고, 전염병까지 돌아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황룡사 탑은 규모가 엄청난 공사여서 27대 선덕여왕이 처음 공사를 시작할때도 백성들의 불만이 많았다.
당시에도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서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경문왕은 무리하게 공사를 감행하였다.
황룡사는 3년간 공사를 지속하여 873년 9월에 완성했다.
탑의 높이는 9층이고, 높이는 22장(10척)로 현재 높이로 약 66m정도이다.

이런 백성들의 힘든 시기에 공사를 감행한 탓에 근종이 군대를 일으켜 도성을 공격하였다.
근종이 이끈 군대는 관군이 아닌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하였고, 근종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어져 죽었다.

이 사건을 빗대서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의 귀가 커져서 당나귀 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는데, 경문왕은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문왕이 귀는 크지만 백성들의 소리는 귀담아 듣지 않는것을 비유적으로 쓴것이라 볼 수 있다.

경문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경문왕은 재위시절 반란과 자연재해, 백성들의 고통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헌안왕은 현명하다는 이유로 경문왕을 사위로 맏아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경문왕은 재위시절 현명하지는 못한 듯하다.

신라 왕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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