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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by [悠悠自適] 202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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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출생 ? ~ 935년 11월
재위 927년 11월 ~ 935년 11월(7년)
가족 부인 3명, 자녀 1남

생애
경순왕의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文聖大王, 46대왕)의 먼 후손이다.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고 모친은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견훤의 추대로 즉위했다. 

전왕(경애왕)의 시신을 들어 서당(西堂)에 빈소(殯所)를 두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시호를 경애(景哀)라고 올리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서 장사지냈다. 
왕건이 사신을 파견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11월, 돌아가신 부친을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모친을 왕태후(王太后)로 추존했다. 
12월, 견훤이 대목군(大木郡, 칠곡)을 침공해 논과 들에 쌓아둔 곡식을 모두 불태웠다.

928년(재위 ​2년) 정월, 고려 장수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 합천 초계)의 도적 흥종(興宗)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5월, 강주(康州)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투항했고, 6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8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축조하게 명하자 왕건이 명지성(命旨城, 포천)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니 패하여 달아났다. 
견훤이 진군하여 대야성 아래 주둔했고 군사를 나누어 보내 벼 이삭을 베어 빼앗아갔다. 
10월, 견훤이 무곡성(武谷城, 군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929년(재위 ​3년) 6월, 천축국(天竺國) 삼장(三藏) 마후라(摩睺羅)가 고려에 이르렀다.
7월, 견훤이 의성부(義成府)의 성을 공격하여 고려 장수 홍술이 나가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순주(順州) 장군 원봉(元逢) 견훤에게 투항했다. 
왕건이 그 소식을 듣고 분노했으나, 원봉은 이전에 전공이 있어 용서하고 단지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10월, 견훤이 가은현(加恩縣, 문경)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930년(재위 4년) 정월, 재암성(載巖城, 현재 청송)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투항했다. 
왕건이 두터운 예로 그를 대접하고 상보(尙父)라 칭했다. 
옛날에 왕건이 신라와 우호를 통하고자 할 때 그가 인도해 주었고 이때에 이르러 투항했다. 
그가 공도 있고 또 나이가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총애하고 포상(褒賞)했다.

​왕건이 견훤과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 아래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했고, 죽이고 사로잡은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과 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투항했다. 
2월,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승전을 알렸고 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아울러 서로 만나기를 청했다. 
9월, 나라 동쪽 연해(沿海)의 주와 군의 부락들이 모두 왕건에게 투항했다.

931년(재위 ​5년) 2월, 왕건이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 지역에 이르러 신라왕을 만나기를 청하자, 왕과 백관들이 교외에서 영접하여 궁안까지 이르렀다. 
서로 마주 보며 간곡하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말하길 
"저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재앙과 난리가 점점 더하며 견훤은 방자하게 행동하여 의롭지 못하게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니 어찌 비통(悲痛)한 마음이 이와 같겠습니까?"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측근 신하들도 오열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왕건도 역시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다.

​십수 일을 머무르고 어가를 돌리니 왕이 혈성(穴城)에 이르기까지 전송(餞送)하고 사촌 동생 유렴(裕廉)을 인질로 삼아 어가를 따르게 했다. 
왕건 휘하의 군사들은 기강이 엄숙하고 정직하여 조금도 예를 범하지 않았다. 
왕도의 백성들이 서로 경사스럽다며 말하길 
"예전 견씨가 왔을 때 마치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뵌 것 같다."
​8월, 왕건이 사신을 파견해 왕에게 채색 비단과 안장이 장식된 말을 전해주고 아울러 신료들과 장졸들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932년(재위 ​6년) 정월, 지진이 발생했고, 4월에는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昢)과 부사로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사신으로 파견해 당에 조공했다.
933년, 당 명종(明宗)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책명을 내렸다.
934년 9월,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홍성) 경계지역의 30여 군과 현이 왕건에게 투항했다. 

935년(재위 ​9년) 10월, 왕이 사방의 토지가 모두 타인의 소유가 되어 국력이 쇠약해지고 세력이 고립되며 스스로 편안하게 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많은 신하들과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항복할 것을 논의했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하여 혹자는 옳다고 했고 혹자는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왕자가 말하길 
"국가의 존망은 필시 천명(天命)에 있습니다. 
오직 충신과 의로운 선비들이 뜻을 합하고 민심도 거두어 합하며 스스로를 확고히 하여 전력을 다해본 이후라면 모를까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까?" 

왕이 말하길 "고립되어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나라의 형세가 온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힘도 없고 약해질 힘도 없기에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지게 이르도록은 차마 내가 할 수가 없다."
비로소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을 사신으로 보내 서신을 가져가게 하여 왕건에게 항복을 청했다. 
왕자가 통곡하고 내며 슬피 울고는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는 곧바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에 귀의(歸依)하여 바위에 의지하여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었으며 풀만 먹다가 생을 마쳤다.

​11월, 왕건이 왕의 서신을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했다.
왕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왕도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부했다.
화려한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에 길게 뻗쳐 도로를 메워 막혔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과 같았다. 
왕건이 교외에 나가 영접하고 노고를 치하했으며 궁궐 동쪽 
제일 좋은 한 구역을 하사하고 장녀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2월,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고 직위는 태자의 위에 있게 했으며 녹봉(祿俸) 1천 석을 주었다.
경순왕을 시종하는 사람과 장수를 모두 채용했고 신라를 경주(慶州)로 고쳐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게 했다. 
예전에 신라가 항복했을 때 왕건이 매우 기뻐하며, 후한 예로 대접한 이후에 사신을 보내 고하길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시니 그것은 큰 것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의 종실(宗室)과 결혼하여 영원히 사위와 장인의 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왕이 답하길 "저의 큰아버지 잡간 억렴(億廉)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있습니다. 
그의 딸이 덕과 용모 두 가지 모두 아름답기에 집안의 살림은 갖추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왕건이 마침내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가 바로 현종(顯宗)의 아버지로 안종(安宗)으로 추봉되었다. 
경종(景宗) 헌화대왕(獻和大王)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고, 그로 인해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봉했다.
공은 대송(大宋) 흥국(興國) 4년(979년) 무인년 돌아가셨고, 시호는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이다. 
나라 사림들이 시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라를 3대(代)로 나누었다. 
시조부터 진덕왕 때까지 28명의 왕의 시대를 상대(上代)라 이르고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명의 왕의 시대를 중대(中代)라 이르렀으며,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20명의 왕의 시대를 하대(下代)라 이르렀다.

가족관계(경순왕 가계도)

· 죽방부인
왕건이 931년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물품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 마의태자
나라가 망한뒤에 개골산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고해서 붙여진 별호이다.
아버지인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투항하자, 강력하게 반대하여 충신과 의사를 모아 사직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 낙랑공주
왕건의 장녀이자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의 소생이다.
외할아버지는 충주의 호족인 유긍달이고, 낙랑공주의 친동생은 고려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다.
혼인전에는 안정숙의공주라 불렸으며, 경순왕과 결혼후에는 낙랑공주, 신란궁부인으로 불렸다.

· 후비 왕씨
왕건의 후비인 성무부인 박씨 소생이다.
외할아버지는 평주의 호족 박수경이다.
박수경은 왕건에게 세명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성무부인은 둘째딸이다.
성무부인은 4남1녀를 낳았는데, 그 딸이 경순왕의 후비이다.

주요사건
· 신라의 투항과 멸망
935년 10월, 후백제의 신검이 반정을 하여 견훤을 유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겠다고 공표한다.
그해 11월, 왕건이 대상 왕철을 보내 항복을 받아들이고, 경순왕을 영접했다.
이로써 신라의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대세는 왕건에게 기울었고, 후백제의 신검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936년 9월에 왕건은 8만7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견훤도 합류했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일선에서 처음 전투를 벌였고, 신검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그리고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지만, 후백제군이 싸움을 포기하는 가운데 고려군이 추격해오자 신검은 항복하였다.
왕건이 완산주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냈고,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한편, 경순왕은 녹읍으로 받은 경주지역을 다스리다 978년(고려 경종3년)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경기도 연전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경순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경순왕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왕권도 미약하였고, 당시 상황이 어려워 결국 고려 왕건에서 투항하고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의 신분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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