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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by [悠悠自適] 202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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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출생 ? ~ 197년 5월
재위 179년 12월 ~ 197년 5월(17년 5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없음

생애
신대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남무, 별호는 이이모.
신대왕 12년(176년) 3월 태자에 책봉되고, 3년뒤(179년 12월)에 왕에 즉위하였다.
'키가 9척이고,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셌다. 사무처리에 관용과 예리함을 겸비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국천왕은 즉위후 고구려 조정에 개혁을 일으킨다.
연나부와 환나부의 외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지만, 외척들의 반발에 좌가려의 난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을파소같은 뛰어난 인물을 등용해 사회를 변혁하였다.
기존의 관례를 버리고 능력중심의 인재를 등용하고자, 나부체제를 동, 서, 남, 북부로 나누고 4부에 명령하여 국상을 추천하도록 하여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백성의 안위와 국방, 정치안정에 힘쓰던 고국천왕은 197년 5월 생을 마감하고 고국천이라는 지역에 묻혔다.
후사는 없고, 부인도 우씨왕후뿐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이 5형제 중 둘째아들로 되어있다.

기록상에는 첫째와 셋째의 이름이 발기(한자는 다름)로 같은데, 이는 잘못기록된것으로 보인다.
고국천왕이 179년 재위에 올랐는데, 첫째 발기가 반란을 했다면 이때 했어야 했고, 이미 고국천왕은 3년전인 176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18년이 흐른뒤 197년에 첫째와 셋째가 모두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나라 군사를 이끌고 비슷한 시기에 난을 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5형제가 아닌 고국천왕이 장남이고, 발기, 연우, 계수의 4형제가 정황상 맞는것 같다.

삼국사기 고국천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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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과 인물
· 좌가려의 난 
190년 9월 ~ 191년 4월까지 7개월에 걸친 외척들의 반란.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왕후 친척으로 권력을 잡고, 그의 가족들과 외척들이 횡포와 악행을 저질렀다.
고국천왕은 이를 알고 처형하려하니 이에 모반하였다.
191년 4월 반군은 지방세력을 규합해 도성을 압박하였으나, 고국천왕이 이를 진압하고 촤가려등 주모자들을 처형하였다.
이후 외척세력은 약해졌으며, 을파소를 등용해 개혁을 시작하였다.

· 을파소 

서압록곡 좌물촌 몰락한 집안 출신. 안류의 추천으로 국정에 참여.
처음에는 중외대부 벼슬을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자 고국천왕이 국상의 자리에 임명하였다.
백성들이 춘궁기를 넘기기 힘들다는것을 알고, 환곡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양식이 부족한 3월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이후인 10월에 상환하는 진대법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가문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외교정책도 무리없이 잘 처리하였다.
고국천왕 사망후에도 산상왕을 보좌하며 203년 8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을파소가 사망하니 왕과 온 국민이 함께 통곡하였다고 한다.

가족관계(신대왕 가계도)

· 왕후 우씨 

연나부 출신으로 우소의 딸.
180년 2월에 왕후로 책봉되었고, 후사는 없으며 촤가려의 난 이후 정치적 세력이 약해졌다.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죽자, 이를 숨기고 동생 발기와 연우(산상왕)를 찾아가 취수혼으로 다시 왕후에 오른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산상왕 참고.

고국천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고국천왕 재위시에는 좌가려의 난이 있었고, 사망후에는 발기의 난이 있었다.

같은 시기 백제는 초고왕, 신라는 아달라왕, 벌휴왕, 내해왕이 동시기에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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