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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27대 영류왕(榮留王)

by [悠悠自適] 2024.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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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7대 영류왕(榮留王)
출생 ? ~ 642년 10월
재위 618년 9월 ~ 642년 10월(24년 1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

생애
영류왕은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며, 이름은 성이다.
642년 10월 영양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27대 왕에 올랐다.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 수나라의 수군 장수 내호아의 침략을 평양성에서 격퇴한 전쟁 영웅이었다.
영류왕이 즉위하기 6개월전에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 태원 유수로 있던 이연의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화친을 제의했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편으론 당나라의 혼란한 시기를 이용해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영류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626년 6월 이연의 둘째아들 이세민(당 태종)이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세민이 왕에 오르자, 주변국을 압박하고 외교적 우위를 확보한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당과 화친하였다.
이과정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길을 막고 있다고 당나라에 건의하자 당나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백제, 신라와 화친을 종용하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당나라가 강대국으로 떠오르자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해 영토확장의 계획을 꾸민다.
신라 진평왕과 김유신은 고구려가 당나라 방어에 치중할것이라 판단하여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침입하여 함락한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요동에 집중하고,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자 하였다.
이 계획은 국상격인 대대로 직위였던 서부대인 연태조가 주도하여 631년 2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태조는 축성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연개소문이 축성작업을 이어받았다.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은 계속되었고, 영류왕은 638년 10월 신라 칠중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 장군 알천에게 패해 퇴각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태자를 입조시키라고 요구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 조정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지고, 영류왕은 온건파의 의견대로 640년 2월 태자 환권을 장안에 보낸다.
641년 당에서 직방 낭중 진대덕을 보내 태자의 입조에 답하겠다고 하자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강경파는 진대덕은 병법에 능하고 지리에 밝은 인물로, 고구려 지리를 파악하여 당나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영류왕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대덕의 입국을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진대덕은 고구려에 오는 도중에 여러 성읍을 구경할 수 있도록 요청했는데, 영류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진대덕은 요수부터 평양까지 지리와 길목을 읽히고, 군사력까지 조사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 돌아가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침공할것을 간언하였다.
진대덕이 다녀간 뒤에 고구려 강경파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영류왕은 강경파를 무시하고, 장성 축성작업까지 중단하려고 하자 연개소문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오히려 영류왕과 온건파를 척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642년 10월 잔치를 열어 온건파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부대 사열을 이유로 군대를 집결시킨뒤 잔치에 참석한 온건파를 참살하였다.
거사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왕궁까지 가서 영류왕을 포박하여 죽였다.

당 태종은 영류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애도의식을 거행하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영류왕의 능에 대한 기록은 없고, 묘호는 영류왕(榮留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영류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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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과 인물
· 연개소문의 반정

연개소문은 서부 귀족 출신으로, 고구려 국상격인 대대로 연태조의 아들이며, 아버지 연태조가 장성 축성작업 도중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축성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으려 하자 신하들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직접 궁궐로 찾아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겨우 작위를 얻을수 있었다.
631년부터 시작된 축성작업은 16년동안 계속되었다.

영류왕과 온건파가 고구려의 중심이 되자 이들은 강경파의 핵심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성곽 출정식을 핑계로 도성 남쪽에서 잔치를 열어 온건파를 초정하였고,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궁성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잡아 살해하였다.
이렇게 조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막리지에 오른다. 

가족관계(영류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환권
영류왕의 아들로, 640년 당나라에 입조하여 국학에 입학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영류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영류왕은 이미 영양왕때 수나라와의 전쟁을 직접 겪어 당나라와는 전쟁없이 화친정책을 추진했으나, 강경파인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동시대에 백제는 무왕, 의자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진평왕, 선덕여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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