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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28대 보장왕(寶臧王)

by [悠悠自適] 202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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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8대 보장왕(寶臧王)
출생 ? ~ 682년
재위 642년 10월 ~ 668년 9월(25년 11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4남

생애
보장왕은 25대 평원왕의 손자이자 영류왕의 조카이며, 이름은 장, 또는 보장이다.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추대해서 고구려 28대 왕에 올랐다.
보장왕이 즉위하자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 집중되었고,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조정과 군권을 장악한다.
하지만, 안시성 성주만 연개소문 반정과 독재에 반대했는데,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해 안시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한 연개소문은 안시성 성주의 직위를 유지시키고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한편, 이 무렵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었다.
642년 7월 백제가 신라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백제가 유리한 가운데, 8월 신라의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점령하면서 신라는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의 선덕여왕은 10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신라의 요청을 거부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또,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보장왕이 즉위하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살피기 위해 643년 3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계획을 들은 연개소문은 군사를 늘리고 방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의 외면과 백제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조공길을 막고 있다며 원군을 요청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를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는 계획을 세우려고 하자,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고 신라를 공격한다.
이세민은 고구려에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당나라가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한다.

이에 이세민은 대신들을 설득하여 고구려 침략 원정길에 직접 참여한다.
연개소문은 5만명을 남쪽에, 15만명을 당나라 국경지역인 북서쪽에 배치한다.
거기에 안시성의 세력 10만까지 합쳐 당나라 상대로 25만명이 당나라 공격에 대비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바닷길로 올 당나라 군사를 생각해 보장왕을 비롯한 왕실 종친들은 대동강변의 하평양에 머물게 하였다.

645년 3월, 이세민은 일부 신하의 반대에도 10만의 군사로 고구려 출전 명령을 하였다.
4만명은 전함 5백척으로 평양으로 향하였고, 6만명은 이세민이 직접 육로로 진군하였다.
거기에 돌궐, 거란군 수만명이 가세해 이세민이 이끄는 군사는 15만명에 육박하였다.
4월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대가 개모성을 무너뜨렸고, 5월에는 장량의 4만 군대는 비사성을 습격했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상황이 불리해진 연개소문은 4만의 병력을 요동성으로 보내 지원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수천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는데, 이세민의 5만 병력이 당도하여 합류하였다.
고구려군은 이에 수성전을 펼치며 방어하였다.
이세적은 1만의 군사로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여의치 않자 이세민은 5만의 군사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12일만에 요동성을 함락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이세민에게 항복하며 백암성을 내주었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한 이세민은 1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은 들은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고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작전을 한다.
고연수는 잘못된 판단으로 싸움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이세민의 급습을 받아 3만의 군사을 잃고 3만6천의 군사를 이끌고 고혜진과 함께 이세민에 투항하였다.

안시성은 고립되었고, 이세민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안시성주의 전략과 용병술, 안시성 군민들의 방어로 오히려 당군의 피로가 쌓이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당나라는 안시성 주변에 토성까지 쌓아 공격했으나 많은 병력을 잃고 실패하였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고 추위와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고 10월에 당나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면서도 많은 동사자가가 발생해 사상자가 나왔다.

장안으로 돌아간 이세민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남 12주에서 기술자를 동원해 대대적인 전함 축조 작업을 시작한다.
648년 정월, 이세민은 설만철에게 군사 3만을 주고 전함을 동원하여 평양으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649년에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을 세우게 된다.
그렇지만, 649년 4월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고, 고구려와 당나라는 휴전상태를 맞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백제와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는 수세에 몰렸다.
655년 정월, 23개의 성을 잃은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당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정명진과 소정방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퇴각하게된다.
이에 658년에 당나라는 다시 정명진과 설인귀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공격했지만, 또 패배하였다.

659년 11월, 당나라는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660년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백제 의자왕은 7월에 항복하게 되었다.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로 향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의 칠중성을 선제 공격하였고, 나당연합군은 하평양으로 향했다.
당나라 고종도 4만4천의 병력으로 고구려 북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백제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남쪽의 전쟁을 지연시키자, 고구려는 북쪽 방어에 집중하여 4만4천의 당군을 물리쳤다.
이에 당나라는 그해 4월 대병력으로 수륙 양동 작전으로 평양을 향해 진군했지만, 고구려에 패배한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당 고종은 고구려 공격을 중지하였다.
이 사이에 연개소문은 뇌음신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연일 장마가 계속되어 퇴각해야만 했다.

이후 당나라는 소정방, 방효태등이 여러차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던 중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고구려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간의 정권다툼이 일어난것이다.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 직위를 이어받고 조정을 장악하자, 동생 남건과 남산은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남생의 측근을 제거하고, 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남생은 국내성에 몸을 숨기고, 아들을 당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설필하력을 보내 남생을 당나라로 데려온다.

그후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이미 조정은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등을 돌렸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12개의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당 고종도 이 기회를 틈타 남생을 필두로 이적, 설필하력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67년 9월 신성 근처의 16개 성이 함락되고, 그 후 부여성등 40여성이 함락, 668년 9월에는 보장왕이 머무르는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남건, 남산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간다.
남아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당군에 항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고구려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된다.
장안으로 압송된 보장왕은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하여 당나라의 벼슬을 받고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다.

670년 검모잠이 보장왕의 외손자인 안순을 왕으로 세우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검모잠과 안순사이에 갈등이 생겨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는 일이 벌어진다.
671년 그때까지 저항하던 안시성이 무너지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고, 672년 5월 고구려 잔여병은 대부분 신라에 투항하였다.
안동도호부에 있던 보장왕은 677년 요동 도독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다 고구려의 재건을 위해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다 발각된다.
681년 보장왕은 양주로 유배되고, 682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당나라의 보장왕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 돌궐의 돌궐의 가한(추장)이었던 힐리의 무덤옆에 장사를 지냈다.
보장왕은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가 없으며, 그의 이름 보장을 묘호로 삼았다.

 

주요사건과 인물
· 당나라와의 전쟁과 안시성 성주
안시성은 평양으로 가는 길목의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645년 당나라 이세민이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 안시성까지 이르렀다.
이로부터 5개월간 당나라와 안시성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안시성의 성주는 지략이 높고, 용맹스러운 장군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는 반정에도 연개소문에게 굽히지 않았고,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안시성 성주의 직위를 인정하였다.
이런 상황에 당나라의 10만이 넘는 군사로 안시성을 공격하자,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병력을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의 수장인 고연수가 뛰어난 장수가 아님을 판단하고 전면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고구려 대노인 고정의가 전면전보다 방어를 형성해 지구전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고연수는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았고, 패배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고연수에게 이세민은 사람을 보내 고연수의 방어 태새를 느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틈을 이용해 이세민은 고연수의 군대를 기습해 3만을 죽였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3만6천을 이끌고 이세민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안시성은 고립되고 말았다.

이세민은 안시성을 피하여 건안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건안성을 무너뜨리면 양식도 부족하고 고립되어 항복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세적이 반대했다. 
이세적은 건안성은 안시성보다 남쪽에 있는데, 건안성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당나라가 보급로가 차단될것을 우려했다.
이에 이세민은 안시성 공략에 나설수 밖에 없었다.

당시 안시성에는 주둔군 3만과 백성 7만등 약 10만명이 양식과 가축까지 성안에 집결하고 있었다.
드디어 당나라가 안시성을 공격하지만, 성과없이 물러났다.
몇번의 공격에도 실패하자, 항복했던 고연수는 이세민에게 오골성을 공격하라고 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고 지략이 뛰어나지 못해 쉽게 점령할수 있다고 하자 이세민은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나라 장손무기가 고구려에게 후미를 공략당하면 고립된다고 하여 계획은 취소되었다.

여러차례 많은 방법으로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자, 이세민은 토성을 쌓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해 60일만에 안시성보다 높은 토성을 완성해 공격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산에서 많은 흙을 파내 토성을 쌓아서 산사태가 일어나 안시성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안시성 성주는 그 기회에 군사를 성밖으로 보내 토성을 급습하여 탈취하였다.
당군이 어렵게 쌓은 토성이 오히려 고구려 방어벽이 되었다.

토성이 고구려군에 빼앗기자 당나라의 사기는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추위까지 다가왔다.
추위가 시작되면 군량미와 말의 먹이도 부족해서 이세민은 철군을 시작했다.
이세민은 철수하면서 고구려가 당나라 후미를 공격할까봐 안시성앞에서 군사력 시위를 보이고 철수했다.
하지만 철수도중에 요수가 얼지않아 당나라 군대는 진흙길을 통과해야 했고, 군사들과 말, 수레등은 추위와 진흙에 빠져 아우성이었다.

중국을 통일하고 영웅호걸이라 칭한 당 태종 이세민을 비참하게 쫒아낸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조선 시대 이후 세간에 불린 그의 이름인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은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이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히려 안시성 전투와 더 가까운 시기인 고려 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족관계(보장왕 가계도)

· 1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복남
보장왕의 장남이며 태자. 666년 보장왕의 명령에 따라 당나라 산신재에 참가하였다.
682년 보장왕이 사망하자, 686년 당나라는 복남의 아들 보원에게 승계를 시키지만, 보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임무
보장왕의 둘째아들. 647년 12월 보장왕의 명령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당시 보장왕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위해 임무를 장안으로 보냈고, 임무는 당 태종의 화친을 약속받고 귀국했다.
이듬해 4월 당 태종이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를 침략해 화친약조는 깨졌다.

· 덕무
보장왕의 셋째아들. 699년 당나라로부터 안동도독에 봉해져 고구려 지역을 다스렸다.

· 2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안승
보장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669년 2월 고구려 백성 4천여 가구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하고, 680년 문무왕의 질녀와 결혼하였다.
683년 경주에 머물며 소판이라는 봉작을 받고, 김씨 성을 받고 신라 귀족에 편입되었다.

보장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보장왕은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켜서 왕위에 앉힌 영류왕의 조카이다.

연개소문의 섭정으로 왕의로서의 권한은 약했고, 고구려 멸망뒤에 당나라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동시대에 백제는 의자왕이 마지막 왕으로 재위하였고, 신라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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