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출생 ? ~ 618년 9월
재위 590년 10월 ~ 618년 9월(27년 11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
생애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원이다.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590년 10월 평원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26대 왕에 올랐다.
영양왕이 즉위했을때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하였다.
수나라 양견은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고, 크게 4번을 침략하고 전면전을 하였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자주 사신을 보내 고구려 영토를 염탐하고 지형을 파악했고, 고구려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통태를 살폈다.
그리고 수나라가 비밀리에 군사 30만을 형성한다는 소식에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수나라 요서를 먼저 공격하였다.
그러자 수나라 영주 위충이 수성전을 펼치며, 양견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양견은 그해 6월, 한왕 양과 양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3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장마철에 무리한 공격과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전략에 말려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였다.
이렇다할 성과없이 30만 대군이 무너지자 양견은 출전 장수와 병사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고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장마철에 전쟁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말려서 고구려 침략은 중단되었다.
영양왕은 이런 상황에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양견은 어쩔수 없이 화친을 받아들였다.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침략의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요청했지만, 수나라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영양왕은 이미 수나라와의 전쟁전에 백제와 신라에게 군사적 과시를 통해 후방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600년 1월,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신집 5권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603년 영양왕은 고승 장군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항해 고구려군은 퇴각했고, 607년 5월 백제 송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백성 3천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무렵 604년 7월 수나라에서는 양견의 아들 양광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에 올랐다.
양광은 낙양을 새로 중심지로 삼고, 낙양과 북경을 잇는 대수로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왕이 장안에 입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양광은 계속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고, 고구려가 응하지 않자 대군을 형성해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수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608년 2월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8천명의 포로를 잡아갔고, 4월에는 우면산성을 뺏아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후 여러차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이북의 영토중 많은 부분을 회복하였다.
611년 4월, 수나라는 요수 건너편에 집결한뒤 612년 정월 양견은 직접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2월에 요수를 넘고 5월에는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이 전혀 무너지지 않자 양광은 요동성을 포기하고 육합성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육합성 역시 탄탄한 방어막에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한편, 수나라 수군도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진격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그후 수나라는 진퇴를 거듭하며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끌고 30만 대군이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자 위축되었다.
이에 양광은 패전한 우문술을 쇠사슬에 묶어 퇴각하였다.
양광은 613년 정월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여 신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장안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서 퇴각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양광은 614년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양광은 못이기는척 화친을 받아들이고 퇴각했고, 후에도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마되었다.
자존심이 상한 양광은 영양왕에게 입조를 요구했지만, 영양왕은 이를 무시하였다.
수나라는 4차례의 전쟁에 경제는 피폐해졌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618년 봄, 양광은 피살되고 수나라는 몰락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국력을 키우다가 618년 9월 생을 마감하였다.
능의 위치는 기록되지 않았고, 묘호는 영양왕(嬰陽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영양왕 기록
주요사건과 인물
· 1차침입, 강이식 장군
598년 영양왕은 수나라 요서지역을 먼저 공격한다.
이에 수나라 양견은 6월, 한왕 양과 양세적을 원수로 삼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장마철로 인해 군량미 수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전염병까지 돌아 전진을 포기하였다.
한편 주나후가 이끄는 수군은 뱃길을 이용해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 장군의 급습을 받아 군량선을 모두 잃고, 사기가 떨어졌다.
강이식 장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나후의 군대를 수장시켰다.
· 2차침입, 을지문덕 장군(살수대첩)
1차침입이후 수나라는 양견의 둘째아들 양광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양광은 돌궐을 압박해 조공을 약속받고, 고구려에도 조공을 요구했지만 고구려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612년 정월, 113만을 동원하여 좌군과 우군등 총 12군으로 나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좌군은 육로로 우군은 배를 이용해 평양으로 향했다.
양광이 이끄는 좌군은 몇달동안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한 수나라는 요동성에서 멀지않은 육합성을 공격했으나 이역시도 실패하였다.
한편 내호아가 이끄는 우군은 배를 이용해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계략에 빠지고 평양성 깊숙이 진격한 내호아 군은 고구려군에 대패하고, 소수만 퇴각했다.
육지에서는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전략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우중문과 우문술을 찾아갔다.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을 하고,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뒤늦게 우중문은 군사를 보내 을지문덕을 추격하지만 실패했고, 우중문과 우문술은 서로 의견이 맞지않아 마찰을 빚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은,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중에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귀신같은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오묘한 헤아림은 지리에 통달했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을 알면 멈추시길 바라노라.
우문술은 병력이 피로에 지쳐 더이상 진군이 어려워지자 회군을 결정하였고,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살수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다.
그 결과 30만 5천의 수나라군사는 2천 7백으로 줄었고, 나머지는 궤멸되었다.
양광은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고 장안으로 돌아갔고,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이났다.
· 3차침입, 요동성, 신성 전투
613년 4월 양광은 요수를 건너 좌군은 신성으로, 우군은 신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한 양광은 흙포대 1백만개를 동원해 요동성보다 높은 흙벽을 쌓았다.
그리고 흙벽에서 요동성을 공격하여 효과가 있자, 계속 흙벽을 쌓을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수나라 장안에서 예부상서 양현감이 군량을 수송하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양광은 그날밤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틀이 지난후에야 수나라가 철수했음을 알고, 그들을 쫒아 수천명을 죽였다.
· 4차침입, 비사성 전투, 화친제의
614년 7월 양광은 군사를 징집하여 내호아를 선봉장으로 고구려의 전진기지인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유인전을 펼쳤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내호아는 평양성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는데, 영양왕은 양광에게 화친을 제의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계속된 전쟁으로 의욕을 상실했고, 중국 내륙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양광은 화친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가족관계(영양왕 가계도)
· 왕후, 환치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아들 환치에 대해서는 이름만 남아있다.
영양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영양왕은 수나라의 많은 침략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역사를 정리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였다.
동시대에 백제는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진평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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