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백제] 30대 무왕(武王)

by [悠悠自適] 2025. 1. 29.
반응형

 

백제 30대 무왕(武王)
출생 ? ~ 641년 3월
재위 600년 5월 ~ 641년 3월(40년 10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

생애
삼국사기에는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이름은 장(璋)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측의 기록에는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위덕왕-아좌태자측과 혜왕-법왕측과의 왕권다툼에서 어느쪽이 왕권을 잡았는지 알 수 없기에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한다.
또한 무왕은 서동요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만 있을뿐, 삼국사기 기록에는 없다.
때문에 선화공주와의 기록도 삼국사기에는 없다.

600년 5월, 법왕이 사망하자 백제 30대 왕에 올랐다.
무왕은 풍채가 거대하고 뜻과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602년(재위 3년)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아막산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기병 수천을 보내 방어하니 별다른 이득없이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외석, 천산, 옹잠등 4곳에 성을 쌓고 백제 지역을 침공하니, 무왕은 좌평 해수에게 4만의 군사를 주고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이 막아 싸웠다.
상황이 불리해진 해수는 퇴각하고, 천산지역에서 복병을 두고 기다렸다.
무은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추격해오자, 기습을 가해 전투가 일어났다.
하지만 신라 무은의 아들 귀산의 활약과 죽음으로 백제군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605년(재위 6년) 2월, 각산성을 축조하고 8월에는 신라가 동쪽 변방을 침공했다.
606년 3월 왕도에 흙비(황사비)가 내려 낮에도 어두웠고, 4월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607년 3월, 연문진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좌평 왕효린을 보내 조공하면서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이에 수양제가 허락하며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라 명했다.
5월에는 고구려가 송산성을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석두성을 공격해 포로 3천을 잡아 돌아갔다.

608년(재위 9년) 3월, 수나라 배청이 표문을 들고 왜나라로 가면서 백제 남쪽 길을 경유했다.
611년 2월, 수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별하려고 하니, 무왕은 국지모를 보내 군사를 움직이는 날짜를 청하자 수양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상을 내렸다.
또한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 무왕과 함께 상의했다.
8월에는 적암성을 축조하고, 10월에는 신라 가잠성을 포위해 성주 찬덕을 죽이고 성을 멸했다.

612년 수나라 군사가 요하를 건너자 무왕은 국경을 더욱 방비했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두가지의 생각이 있었다.
4월 궁성 남문에서 벼락이 있었고, 5월에는 홍수로 민가가 떠내려가고 침수되었다.
616년 10월, 달솔 백기에게 병사 8천을 주고 신라 모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618년 신라 장군 변품이 가잠성을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신라 당주 해론이 전사했다.

623년(재위 24년) 군사를 보내 신라 늑노현을 공격했다.
624년 정월, 당나라에 조공하니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무왕을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했다.
10월에는 신라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등 6곳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626년, 당나라에 명광개를 바치고 고구려가 조공하는 길을 막았다고 호소하자 당 고조가 조서를 보내 고구려와 평화롭게 지내라고 타일렀다.
8월에는 신라 왕재성을 공격하고 성주 동소를 죽였다.

627년(재위 28년) 7월, 장군 사걸이 신라 서쪽의 두개의 성을 빼앗고 포로 3백명을 노획했다.
무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동해 웅진으로 가서 주둔했다.
그러자 신라 진평왕은 당나라에 위급하다고 사신을 보냈고, 무왕은 이내 중지했다.
8월에 무왕은 조카 복신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당 태종 이세민은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지간으로 서로 침략한다면서 화목하게 지내고 군사적 행동을 멈추라고 하였다.

628년(재위 29년), 무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 가잠성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630년 2월, 사비의 궁성을 중수하고, 무왕이 웅진성을 행차했다.
하지만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 공사를 중지하고 7월 웅진에서 돌아왔다.
632년 정월, 장남 의자를 태자로 봉했고, 2월에는 마천성을 개축, 7월에는 신라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633년(재위 34년), 장수를 보내 신라 서곡성을 공격해 13일만에 점령했다.
634년 2월, 왕흥사가 완공되었고, 왕흥사는 강앞에 위치하고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무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
3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 거리의 물을 끌어들여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 섬을 축조해 방장선산과 비견되었다.

636년(재위 37년) 3월, 무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양쪽 언덕에는 기암괴석과 기이한 화초등이 있어 그림을 그려 놓은것 같았다.
무왕이 술을 마시고 즐거움에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많은 신하들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5월에는 장군 우소에게 군사 5백을 주고 신라 독산성을 습격했는데, 신라 장군 알천의 기습에 당해 많은 군사가 죽고 우소는 사로잡혔다.

637년(재위 38년) 12월, 당나라에 철제 갑옷과 도끼를 조공하니 당태종이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단을 하사했다.
640년 2월, 무왕은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것을 청했다.
641년 3월,  무왕이 생을 마감했고, 시호는 무(武)라고 하였다.
당나라도 애도식을 거행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 부의를 후하게 내렸다.

삼국사기 무왕 기록

 

주요사건
· 무왕의 계보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로 되어있고, 중국의 기록 북사와 수서에는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면, 성왕-위덕왕(장남)-혜왕(차남, 위덕왕 동생)-법왕(혜왕의 아들)-무왕(법왕의 아들)순이고, 
중국측 기록은, 성왕-위덕왕(장남)-혜왕(차남, 위덕왕 동생)-법왕(혜왕의 아들)-무왕(위덕왕의 차남, 장남은 아좌태자)순이다.
혜왕과 법왕의 재위기간이 모두 합쳐도 2년이 안되는것을 감안하면, 아좌태자측에서 반정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간 백제의 반정후에 왕에 오른 예를 보면 왕위에 오른뒤 좌평등 신하들을 교체하는 기록들이 보이는데, 무왕의 기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이는 오히려 아좌태자의 반정이 실패했을수도 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정황은 이해하나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다.

· 서동요와 선화공주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서동(마를 캐를 사람)이며,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의 결혼이야기는 없고,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무왕은 즉위시부터 재위기간 내내 신라와 전쟁을 벌이며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그런 무왕이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다.
또한 신라 화랑의 풍월주 계보와 그 주변 혈통의 기록을 한 화랑세기에도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는 기록은 없다.

가족관계(무왕 가계도)

· 왕후
왕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의자왕
백제 31대 왕. 의자왕편 참고.

무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무왕은 40년 10개월간 즉위하여 혜왕과 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백제의 중흥기를 구축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동시대에 신라는 진평왕, 선덕여왕이 재위하였고, 고구려는 영양왕, 영류왕이 재위하였다.

백제 왕 계보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백제 왕 계보(고구려 왕 계보)  (0) 2025.01.31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  (0) 2025.01.30
[백제] 29대 법왕(法王)  (0) 2025.01.24
[백제] 28대 혜왕(惠王)  (0) 2025.01.23
[백제] 27대 위덕왕(威德王)  (0)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