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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

by [悠悠自適] 2025.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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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
출생 ? ~ 660년
재위 641년 3월 ~ 660년 7월(19년 4개월)
가족 부인 1명이상, 자녀 41남(?)

생애
의자왕은 무왕의 장남이고, 641년 3월 무왕이 사망하자 백제 31대 왕에 올랐다.
의자왕은 웅대하고 용맹했으며, 담력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고, 632년(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효행이 깊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사람들이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즉위후, 당 태종(이세민)이 사신을 보내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했다.
이에 의자왕도 표문을 올리고 사례를 하였다.

642년(재위 2년) 2월, 전국을 순행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사형을 제외하고 모두 풀어주었다.
7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 미후등 40여개 성을 침공해 함락시켰다.
8월, 장군 윤충과 1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 대야성을 공격했고, 성주 품석(김춘추의 사위)과 고타소(김춘추의 딸)가 항복했으나 목을 베었다.
또, 남녀 1천여명을 잡아 백제 서쪽지역에 살게하고 군사를 남겨 대야성을 지키게 하였다.
윤충에게 말 20필과 천석의 쌀을 내려 공을 치하했다.

643년(재위 3년) 11월,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을 하고 신라 당항성을 취해 뱃길을 막는 계획을 하였다.
그리고 당항성을 공격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니 병사들을 철수했다.
644년 정월, 당나라 이세민이 사신을 보내 양국을 타이르니 의자왕이 표문을 올려 이유를 설명하고 사과했다.
또한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9월에는 신라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서 7곳의 성을 빼앗았다.

645년(재위 5년),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에서 군사를 징벌했는데, 그 틈을 이용해 신라 7곳의 성을 습격해 빼앗았고, 신라는 김유신이 반격하였다.
647년 10월, 장군 의직에게 3천의 군사를 주고 신라 무산성 지역에 진을 치고, 감물과 동잠 두곳의 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 김유신이 결사항전으로 대항하니 백제군을 패배하고 의직이 홀로 돌아왔다.
648년 3월, 의직이 신라 서쪽의 요거등 10여개의 성을 습격해 빼앗았다.
4월에는 옥문곡으로 진군했으나 김유신과 두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649년(재위 9년) 8월, 좌장 은상에게 7천의 병사를 주고 신라 석토등 7곳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 유신, 진춘, 천존, 죽지등이 맞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흩어진 군사를 모아 다시 전투를 벌였는데 백제군이 패배했다.
651년, 당나라 사신이 조서를 내렸는데, 해동 3국(고구려, 백제, 신라)는 터를 닦은지 오래되고 경계가 나란히 있어 서로 싫어하고 전쟁을 일으키니 화목하게 지내라고 했다.

653년(재위 13년) 봄에 가뭄이 들어 백성이 기근으로 굶주렸고, 8월에는 왜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655년 2월,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왕궁 남쪽에는 망해정을 세웠다.
8월,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 30여 성을 공격해 파괴했다.
그러자 신라 김춘추가 당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656년(재위 16년) 의자왕이 궁인들과 주색에 빠져 향락을 탐하며 술 마시는것을 멈추지 않아 좌평 성충이 간언했는데, 의자왕은 화를내며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병이 들어 옥사했는데, 임종을 앞두고 전쟁이 일어날것이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의자왕은 듣지 않았다.

657년(재위 17년) 정월, 의자왕은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하사했다.
4월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659년 2월, 여우 무리가 궁안에 들어와 흰여우 한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앉았다.
4월에는 장수를 보내 신라 독산, 동잠의 두성을 침공했다.

660년(재위 20년) 2월, 왕도의 우물이 핏빛이었고, 서해바다에 작은 물고기들이 죽었다.
백성들이 먹을 수 없을 정도였고, 사비하의 물이 붉어 마치 핏빛같았다.
그 후에도 흉흉한 일들과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왕궁에도 기이한 일이 벌어져 의자왕이 땅을 파게 했는데 거북이가 나왔다.
그리고 등에 '백제는 둥근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무당이 백제는 이제 둥근달에서 기울게 되고, 신라는 점차 둥근달로 차게 된다고 하니 의자왕이 크게 노하여 무당을 죽였다.
누군가 반대로 이야기하니 의자왕이 기뻐했다.

당 고종이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13만의 병력으로 백제를 정벌하려고 했다.
또한 신라왕 김춘추를 행군총관으로 삼아 합세하게 했다.
소정방이 부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는 김유신을 보내 5만의 정예병으로 이르렀다.

의자왕이 그 소식을 듣고, 싸울지 방어할지 의논했는데, 좌평 의직이 당군은 물에 익숙하지 않으니 급습하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달솔 상영이 반대 의견을 내고 방어를 해야 한다고 말하니, 의자왕은 어찌할지 몰랐다.
그래서 유배중이었던 좌평 흥수에게 물었는데, 흥수는 평지에서 전투하면 불리하고, 백강, 탄현등 백제 요지에서는 유리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는 유배중이고 그의 얘기는 믿을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의자왕은 대신들의 의견을 동의했고, 장군 계백에게 5천의 결사대를 황산으로 출병시켰다.
계백은 신라와 4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백제 병사가 적었음에도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에는 패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그리고 웅진 어귀에 소정방 군대와 백제군은 전투를 했으나 백제군은 패배했다.

이후 소정방의 군대가 도성까지 이르렀고, 백제군이 막아 싸웠으나 패배했고 사망자가 1만여명이었다.
이에 의자왕은 피할수 없음을 알고 '성충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 후회스럽다'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은 성을 포위했고,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성을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자 융에게 '의자왕이 태자와 성을 나갔고,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으니 당나라 군사가 물러나면 우리가 안전하겠냐?'라며 측근들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갔다.
백성들마저 같이 빠져나가니 둘째 아들 태는 막지 못했다.

소정방이 성벽을 넘자 태는 항복하며 성문을 열었다.
그러자 의자왕과 태자 효가 여러성과 함께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의자왕, 태자, 왕자,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로 보냈다.
이로써 BC 18년 온조왕부터 이어져 온 백제는 660년 7월에 그 역사를 마감하였다.
​이후 의자왕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그해 병들어 사망했다.

삼국사기 의자왕 기록

 

주요사건
· 계백장군과 황산벌 전투
삼국사기 <계백열전>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백은 백제인으로 벼슬은 달솔이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했는데, 계백은 5천의 결사대로 그들을 막았다.
계백이 말하길 "일국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과 당면하게 되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처자식이 백제가 망하고 노비가 될까 두렵다. 치욕스럽게 사느니 흔쾌히 죽는것만 못하다."하며 마침내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

황산벌 벌판에 도착해 3곳에 군영을 설치해 신라군을 맞아 전투를 하기전에 결사대에 말하기를
"옛날 월나라 왕인 구천은 5천병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지금 마땅히 각자 떨쳐 일어나 전력을 다해 결사적으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마침내 격렬하게 전투를 벌여 한명이 천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신라군이 퇴각했다.
이와 같이 나갔다 물러나길 총 4번에 이르러 계백은 온힘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다.


·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부흥운동
삼국사기 <흑치상지열전>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 신장은 7척 남짓하고 날래고 굳세었으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국의 달솔의 벼슬과 풍달군장을 겸하였는데, 당나라 자사의 직위와 같았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할때 상지는 인솔하던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소정방은 의자왕을 가두고 병사들을 풀어 대규모 약탈을 행했다.
상지는 이것이 두려워 측근 추장 10여명과 달아나 도망친 사람들을 모아 임존산에 의지해 스스로를 지켰다.
열흘이 지나지 않아 돌아온 사람이 3만명이었다.
소정방은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마침내 흑치상지 부대는 백제의 2백여 성을 수복했다.

661년에서 663년동안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파견해 흑치상지를 회유해서 항복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 원외장군 양주자사가 되었다.
수차례 정복 전투에 참전하여 공적을 쌓아 작위, 포상등 특별한 것들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 연연도대총관이 되었고, 이다조등과 함께 돌궐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또한 중랑장 보벽이 끝까지 추격하여 남의 공을 가로채려고 했는데, 조서를 상지에게 내려 함께 토벌케 했다.

보벽은 홀로 진격하다가 오히려 돌궐에게 군대가 몰살되었다.
보벽은 옥리에게 처형되었고, 상지는 연좌책임이 되어 공적이 없어졌다.
또 주흥등이 흑치상지와 응양장군 조회절이 모반을 일으킨다고 무고했다가 흑치상지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상지는 아랫사람을 다루는데 인정이 많았는데, 상지가 타던 말이 관리에게 채찍질을 당하자 혹자들이 그에게 죄를 주라고 청했다.
하지만 상지는 "어찌 개인의 말로 인해 관병에게 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하며, 포상으로 받은 물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물을 남겨두지 않았다.
상지가 사망하자 모두 그의 억울함을 애통해 하였다.


가족관계(의자왕 가계도)

· 왕후
왕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일본서기에 은고부인에 대해 기록이 있는데 왕후가 은고부인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은고부인을 후비로 생각한것은 개인적인 추측일뿐이다.

41명의 자식들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여러 후비가 있었을 것이다.

· 부여 융
융은 644년(재위 4년) 정월,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융은 태자의 직위를 이어가지 못했다.
백제가 몰락하던 660년의 태자는 효였다.
이는 그 사이에 융세력과 효세력간의 권력다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656년 좌평 성충이 감옥이 갇히고, 660년 좌평 흥수가 감옥에 갇힌것으로 볼때 태자교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간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융에게 웅진도독 대방군왕의 직책을 내려 장군 손인사와 함께 토벌군 7천을 주어 백제로 돌려보냈다.
백제 부흥군은 연합군에 패배해고, 융은 신라 문무왕을 만나 백제 옛땅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융은 웅진도독부 1도독부 7주 51현제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융은 신라의 압력등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신라는 지배권을 장악했고, 웅진도독부는 만주의 건안고성으로 옮겼다.
융은 이곳에서 백제 유민들을 모아 다스리다가 682년에 생을 마감했다.

· 부여 태
태는 의자왕의 차남이다. 
사비성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포위되자,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진성으로 피했고, 태는 그들을 대신해 사비성을 지켰다.
하지만, 태자 효의 아들인 문사가 태에게 살해될것을 염려해 측근들을 데리고 사비성을 탈출하자, 백성들까지 탈출했다.
이에 사비성은 전의상실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660년 9월, 소정방에 의해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 후비(은고부인)
삼국사기 기록에는 왕후나 후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과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요사스러운 부인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의 655년 2월,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로 의자왕의 행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따라서 이때를 전후해서 태자가 교체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다.

· 부여 효
효는 의자왕의 3남이다. 효가 후비(은고부인)의 소생인지는 기록은 없고, 추측일뿐이다.
다만, 효의 아들 문사가 숙부인 왕자 태에게 살해될것을 염려해서 탈출했다는것을 볼때, 태와 효는 동복형제가 아님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효역시 660년 9월, 소정방에 의해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 부여 풍
풍은 왕후의 소생인지 후비의 소생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할아버지인 무왕 32년(631년)에 왜나라에 볼모로 갔고, 그곳에서 성장했다.
백제가 몰락한뒤 무왕의 조카 복신이 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왜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는데, 풍은 전함 170척과 1만의 병력을 이끌고 복신을 도왔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복신이 도침을 살해했고, 풍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풍은 이를 미리 눈치채서 복신을 제거하였다.
663년 9월, 백강에서 나당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후 동생 용과 연락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후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나머지 왕자들(연, 용, 궁, 총승, 층지등)
나머지 왕자들은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거나, 백제나 왜나라에 남아 부흥운동을 참여하다 생을 마감했다.

의자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의자왕은 재위 전반기에는 해동증자라 불릴만큼 백제를 잘 이끌어가다 후반기에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결국에는 678년의 역사를 가진 백제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동시대에 신라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이 재위하였고, 고구려는 영류왕, 보장왕을 마지막으로 백제 멸망 8년뒤에 고구려도 멸망하였다.

백제 왕 계보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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