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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by [悠悠自適]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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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출생 ? ~ 647년 1월
재위 632년 1월 ~ 647년 1월(15년)
가족 남편 3명(?)

생애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딸이고, 모친은 마야부인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어질며, 현명하고 영민했다.
632년 1월, 진평왕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나라사람들이 덕만을 옹립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리며, 신라 27대 왕에 올랐다.

이전 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얻어온 모란꽃 그림과 열매를 덕만에게 보였는데, 덕만이 말하길
"이 꽃은 비록 매우 아름다우나 필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길 "덕만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 덕만이 대답하길,
"그림의 꽃에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무릇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서 향기가 나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꽃은 아름다우나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
그 씨를 심었더니 정말로 말한 바와 같았고, 식견이 이처럼 앞섰다.

632년(재위 원년) 2월, 대신 을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5월에 가뭄이 들고, 6월에 이르러 비가 왔다.
10월에는 사신을 파견해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을 찾아가 위무하고 진휼했다.
633년 정월,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여러 주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했다.
2월에는 지진, 7월에는 당나라에 조공, 8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634년(재위 3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고, 분황사가 낙성(落成, 공사를 완성하여 끝내다)되었다.
3월, 우박이 떨어졌고 크기가 밤만 하였다.
635년, 당나라에서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부친의 봉작을 잇게 했고,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를 보내 주현을 돌아보고 위무하게 했다.

636년(재위 5년) 1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에 제수했다.
3월,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도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강론했으며, 백명에게 도첩을 주며, 승려가 되는것을 허락했다.

636년(재위 5년) 5월,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에 대규모로 모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좌우 신하에게 말하길 "두꺼비의 노기가 서린 눈은 병사들의 형상이다.
내가 일찍이 듣기로 서남쪽 변경에도 지명이 옥문곡이라는 곳이 있을것이다.
그곳에 혹여나 이웃나라 병사들이 몰래 들어와 그 안에 있지 싶다."

곧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수색하게 하였다.
과연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고자 무장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와서 그곳에서 매복해 있어 알천이 불시에 습격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자장법사가 불법을 구하러 당으로 유학갔다.

637년(재위 6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제수했고, 7월에는 알천을 대장군으로 제수했다.
638년 3월, 칠중성 남쪽 큰 돌이 저절로 35보 이동했다.
9월에는 비가 누른 꽃처럼 내렸고,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 칠중성을 침공하여 백성들이 놀라고 어지러워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곳을 편안하게 했다.
11월, 알천이 고구려와 칠중성 밖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격파하였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아주 많았다.

639년(재위 8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삼고, 사찬 진주에게 명하여 그곳을 지키게 했다.
7월, 동해의 바닷물이 붉은색으로 변했고, 뜨거워져 바다 생물들이 죽었다.
640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으로 보내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했다.
이때 당태종이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들을 대규모로 불러들여 학문을 가르치는 관직을 주고 여러차례 국자감에 행차하여 그들에게 강론케 했다.

학생들이 한가지 이상의 경전에 능히 명석하다면 모두 벼슬을 맡겼다.
학사 1,200칸을 증축하고, 학생을 3,260명으로 증원하여 채웠다.
이때 사방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자들이 도읍(당나라 장안)에 운집했다.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 역시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켰다.

642년(재위 11년) 정월, 당나라에 조공하고,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대규모의 병사를 일으켜 당항성을 빼앗고자 모의했는데, 당나라로 가는 길을 끊으려고 했다.
왕이 사신을 파견해 당태종에게 급히 이 사실을 고했다.
같은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대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빼앗았고, 도독 이찬 품석, 사진 죽죽과 용석등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겨울에 왕이 대야성 전투의 보복으로 백제를 정벌하고자 했다.

643년(재위 12년) 3월, 불법을 구하러 당에 유학갔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말을 올리길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욕보이게 하고 여러차례 수십의 성을 공격했습니다.
양국이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빼앗고자 장차 올해 9월에 대규모의 병력을 일으킨다면 우리나라의 사직은 반드시 온전하지 않게 될것입니다.
삼가 사신을 보내 대국에 구원을 바라오니, 예비 부대라도 구원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사신에게 이르길 "내가 실로 너희가 두나라에 침공당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빈번하게 사신을 보내 너희 삼국이 화친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발걸음을 돌리자마자 마음이 변하여 신라를 집어삼켜 멸하려는 뜻을 보이며 너희의 강토를 나누어 가지려 한다.
신라는 어떤 기묘한 계책을 세워 나라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사신이 말하길 "저희 왕께서는 일이 곤궁해지고 계책을 다하여 오로지 급히 대국에 알리고 온전해지길 바랍니다."

황제가 말하길 "내가 변방의 병력을 소규모로 징발해 거란과 말갈을 통솔하여 요동으로 곧바로 간다면 너희 나라는 스스로 풀릴것이고, 가히 1년정도는 포위가 완화될 것이다.
이후에 이어오는 군대가 없다는 것을 알면 돌아와 방자하게 침략하고 업신여길 것이니 4국이 모두 어지러워질것이고 신라도 편안하지 않을것이다.
이것이 제1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수천 벌의 붉은 전투복과 붉은 깃발을 배급해 줄것이니 두나라의 병사가 이르면 이것들을 늘여 세우도록 하라.
저들이 이것을 보고 당나라 병사로 여겨 필시 모두 도망칠 것이다. 이것이 제2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준함을 믿고 병장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난잡하게 섞여 서로 모여 연회만 열고 있으니 내가 수십, 수백척에 무장한 병사들을 싣고 바다를 건너 그땅을 바로 습격할 것이다.
신라는 부인이 왕으로 있으니 이웃 국가가 가볍게 보아 업신여기고 군주가 덕을 잃어 도적이 만연하여 해마다 편안하지 못하다.
내가 종친 한명을 함께 보내어 너희 나라의 왕으로 삼고 홀로 왕의 일을 보는것은 불가능하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 너희 나라를 편안하기를 기다려 너희 스스로 지킬 수 있게 하려한다.
이것이 제3계책이다. 그대는 마땅히 이를 생각해보고 장차 어떤일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예만 할뿐 대답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사신이 어리석고 비루해 군사를 청하고 급히 고하려 올 인재가 아니라며 한탄했다.

644년(재위 13년) 정월, 당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명하여 옥쇄가 찍혀있는 왕의 명령서를 가져가 고구려 왕에게 보내며 말하길, 
"신라는 국가의 운명을 맡겨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다. 너희와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대의 나라를 공격하리라!"

연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하길 "고구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수나라가 연이어 고구려를 쳐들어왔을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땅 오백리를 탈취하여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습니다.
침탈해간 땅과 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그러기는 힘들것입니다." 그러자 현장이 말하길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하여 쫓아 논하고자 합니까?" 하지만 연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 왕이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라고 명하였고, 크게 이겨 성 7곳을 빼앗았다.

645년(재위 14년) 정월, 김유신이 백제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왕을 뵙지도 못했는데, 백제 대군이 또 변경을 쳐들어왔다.
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그들을 막게 했고, 마침내 집에 가지도 못하고 전장으로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수급 2천을 베었다.
왕에게 보고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데, 또 백제가 침공했다는 급보가 왔다.
왕이 일의 다급해 곧장 말하길 "국가의 존망이 공의 한몸에 달렸으니 바라건대 고생스럽더라도 꺼리지 말고 전장으로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유신은 또 귀가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서쪽으로 출정하는 길에 집문을 지났다.
집안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전장으로 떠나갔다.

3월, 황룡사탑을 처음으로 세웠는데, 자장의 요청에 따른것이다.
5월, 당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여 왕이 3만을 징방하여 당을 도왔다.
백제가 그 빈틈을 타서 나라 서쪽 7곳의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647년(재위 16년) 정월, 비담과 염종등이 여자 왕은 국가를 잘 다스릴 수가 없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모반을 꾀하며 병력을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8월, 왕이 사망했고, 시호는 선덕, 낭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가족관계(선덕여왕 가계도)

·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이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고, <화랑세기>에는 공주시절 김용춘과 결혼하였고, 용춘의 아내였던 천화공주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왕위에 오른뒤에도 선덕여왕은 후사가 없자, 용춘은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흠반과 을제를 동시에 왕의 남편으로 삼았다.
용춘, 흠반, 을제 모두 유부남이었지만, 본부인을 버리고 선덕여왕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주요사건
· 김춘추의 고구려 파견
642년(재위 11년) 7월,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이 사망했다.
이에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로 파견해 군사를 청했다.
대야성이 패했을때, 도독 품석의 처도 죽었는데, 그가 바로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그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말하길 "슬프도다!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집어삼키지 못하겠느냐!"
곧장 왕에게 가서 말하길 "신이 원하옵건데 사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합니다."하니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구려 보장왕이 평소 춘추의 평판을 듣고 있어 엄중하게 병사들로 호위하게 한 후에 그를 만났다.
춘추가 말하길 "지금 백제가 도리를 어겨 긴뱀과 큰돼지처럼 우리 강역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저희 왕께서는 큰 나라의 병마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원하셔서 이에 우리 왕께서 소신으로 하여금 명령을 대왕께 전달하게 했습니다."
이에 보장왕이 말하길 "죽령을 본디 우리 땅인데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가히 병사들을 내어줄 것이다."

춘추가 대답하길 "소신은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뜻은 없으시고, 오직 사신을 위협하고 겁박하시며, 땅만 돌려줄것만 요구하고 계십니다.
신은 죽음이 있을뿐, 다른것은 알지 못합니다."
보장왕은 김춘추의 언행에 불손함에 노하여 벌관에 감금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보내 본국 왕에게 이를 알렸고, 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죽음을 각오란 용맹한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춘추를 구하게 하였다.
유신이 한강을 지나 고구려 남쪽 변경으로 들어서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방면해 돌려보냈다.
유신을 압량주 군주로 제수했다.

선덕여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조의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으로 시달렸다.

이에 당나라를 끌여들이는 정책을 하게 된다.

동시대에 고구려는 영류왕, 보장왕이 재위하였고,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이 재위하였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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