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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by [悠悠自適] 2025.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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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출생 603년 ~ 661년 6월
재위 654년 3월 ~ 661년 6월(7년 3개월)
가족 부인 3명, 자녀 9남4녀

생애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 또는 용수의 아들이다. 
당서(唐書)의 기록에는 진덕여왕의 동생이라고 되어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모친은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며, 왕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 서현(舒玄, 김유신 부친)의 딸이다. 
왕의 외모는 영웅의 위용이 있고 어려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 이찬의 지위를 지냈고 당 황제가 특진(特進)에 제수했다. 
진덕여왕이 돌아가셨을 때 군신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은 굳게 사양하며 말하길 "소신은 늙고 가히 칭할 만한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으로는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춘추공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진실로 가히 세상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 생각합니다. " 
마침내 춘추를 왕으로 받들었고 3번 사양하다 부득이하게 보위에 올랐다.

654년(재위 원년) 4월, 왕이 돌아가신 부친 문흥대왕(文興大王)을 추봉하고 모친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5월, 왕이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하게 헤아려 이방부의 법 60여 조목(條目)을 수정하고 바로잡게 했다. 
당에서 부절을 지닌 사신을 파견해 예를 갖추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했다. 
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사은(謝恩)했다.

655년(재위 2년) 정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제수하고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해 우리 북쪽 변경을 침공해 33곳의 성을 빼앗았다. 
왕이 당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청했다.

3월,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웠고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湌, 파진찬)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湌, 각간)으로 지경(智鏡)와 개원(愷元)을 이찬으로 각각 삼았다.
10월,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진상했는데 머리가 하나에 몸은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湌, 대각간)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656년(재위 ​3년), 김인문이 당에서 귀환했다. 
마침내 군주로 임명해 장산성(獐山城)을 축조하는데 감독케 했다.  
7월, 아들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문왕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4년(서기 657년) 일선군에 홍수로 익사한 사람이 3백여 명이다.
동쪽 토함산 땅에 불이 났는데 3년이 지나 꺼졌다.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북쪽 바위가 무너지며 부서져 쌀이 되어 먹었더니 창고에 묵힌 쌀 같았다.

658년(재위 5년) 정월, 중시 문충을 직위를 고쳐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3월, 왕이 하슬라주 땅은 말갈과 맞닿아 있어 백성들이 편안할 수가 없어 소경(小京)을 혁파(革罷)하고 주(州)로 삼아 도독을 배치해 지키게 했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659년(재위 ​6년) 4월, 백제가 빈번하게 변경을 침범해 왕이 장차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8월,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했다. 
공주 기군강(基郡江)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고 길이가 100척이었으며 물고기를 먹은 사람이 죽었다. 
10월, 당에 군사를 청하였으나 답이 없어 왕이 조정에 머무르며 근심 어린 얼굴빛이었다. 홀연히 왕 앞에 사람이 나타났는데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말하길 "비록 신이 백골(白骨)이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국가에 보답할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 당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내년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정벌하러 올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시기 때문에 이를 알려드리옵니다."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이 매우 이를 경이롭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이어서 해당 부서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창건해 장춘과 파랑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660년(재위 ​7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어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제수했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았다. 
또, 좌효위장군 (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에게 수군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정벌하라고 명했다. 
칙서를 내려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장병들을 거느리고 지원(支援)하게 했다.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도읍지에서 출병했다.
6월 18일,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행차했고 소정방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해서 선단이 천리를 이어 해류(海流)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6월 21일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가서 소정방을 덕물도(德物島, 지금 옹진 덕적도)에서 영접(迎接)하게 했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이르길 "내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회합(會合)하여 의자의 도성을 깨뜨려 함락시키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길 "대왕께서는 서서 대군을 기다리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아침을 드시고 이곳에 이르실 겁니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에게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했다. 법민이 (왕에게) 이르러 말하길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합니다." 
왕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 또는 흠순(欽純) 등에게 명해 정예군 5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응원(應援)하게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행차했다.

​유신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으로 진군했고 백제 장군 계백(堦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험한 지형을 먼저 점거(占據)하여 세 곳에 군영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이 세 곳의 길로 군사를 나누어 네 번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졌고 사졸들의 전력(戰力)이 다해갔다. 
장군 흠순(欽純)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이르길 "신하가 충성스러운 것만 한 것이 없고 자식은 효도만 한 것이 없다.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충과 효를 모두 갖추는 것이다."

반굴이 말하길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곧장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전력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좌장군(左將軍)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또는 관창(官昌)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길 
"내 아들은 겨우 16살이지만 뜻과 의기가 자못 용감하다. 오늘 전투에서 능히 삼군의 으뜸이 되어라!" 
관창이 예라고 대답하고 갑옷 입은 말을 타고 한 자루의 창으로 곧바로 적진에 다다랐으나 적에게 사로잡혀 계백에게 보내졌다. 

​계백이 사람을 시켜 투구를 벗기게 했는데 어린 소년이 또한 용감하니 이를 가엽게 여기어 차마 해를 가하지는 못하고 곧 한탄하며 말하길 
"신라에게 대적하기는 불가능하겠구나. 소년들이 더욱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사들은 어떠하겠는가!" 
곧 관창을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다. 
관창이 부친께 고하길 "소자가 적중에 들어가서 적장을 베거나 수기를 뽑지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우물물을 손으로 한 움큼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묶어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으니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고 말하길 "내 아들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해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슬프고도 분하여 죽을 마음을 품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백제군을 크게 이겼다. 
계백도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때 소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기벌포(伎伐浦)에 이르렀는데 백제 군대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유신 등이 당 군영에 이르렀고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 이후에 도착했다고 장차 신라 독군 김문영(金文潁) 혹은 영(永)을 군영의 문에서 참수하려 했다. 
유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길 "대장군께서 황산의 전투를 보지도 않고 기일보다 늦었다는 죄를 삼으려는데 나는 죄가 없어 이런 모욕(侮辱)을 당할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과 결전을 치르고 그러한 연유에 백제를 격파하겠다." 

이에 군문에서 도끼를 잡고 몹시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곧게 섰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세차게 나왔다.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밟으며 말하길 "신라 군사들이 장차 변란(變亂)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로 하여금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써 보내어 당나라 군사들이 물러나기를 애걸했다. 

660년(재위 ​7년) 7월 12일, 나당 연합군이 의자의 도성이 있는 소부리(所夫里)의 벌판으로 진군했다. 
소정방이 꺼려 하여 앞으로 나가가지 않자 유신이 그를 설득(說得)해 연합군이 용감하게 네 갈래로 일제히 떨쳐 일어났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으로 하여금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 보냈으나 소정방이 이를 물리쳤고 왕의 서자 궁(躬)과 좌평 6명이 앞에서 죄를 빌었으나 이 또한 물리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7월 13일, 의자가 밤에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달아나 웅진성(熊津城)을 지켰다. 
의자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성을 나와 항복했다. 
법민이 말 앞에 융을 무릎을 꿇어앉혀 얼굴에 침을 뱉고 꾸짖으며 말하길 "지난번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원통하게 죽여 옥중에서 묻혔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가슴이 아프고 머리를 괴롭게 했는데 지금은 너의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 융이 아무런 말도 없이 땅에 엎드려 있었다.

7월 18일, 의자가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대를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와서 항복했다.
왕이 의자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에 이르렀고,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해 승전보를 알렸다. 
8월 2일, 술자리를 크게 베풀어 장병들을 위로했다. 
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대청 위에 앉고 의자왕과 태자 융은 대청 아래에 앉혀 가끔은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자 백제 좌평 등 군신들이 목이 메도록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참수했다. 

모척은 본디 신라인으로 백제로 도망갔었는데, 대야성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성을 함락되게 했기에 그를 잡아 참수한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수를 세면서 말하길 "너는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군을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태워 없애 성 안으로 하여금 식량이 모자라 싸움에 지도록 만들었으니 첫 번째 죄이다. 
품석 부부를 핍박해 죽였으니 두 번째 죄이다. 백제와 함께 본국을 공격했으니 세 번째 죄이다. 그의 사지를 찢어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백제 남은 적들이 남잠(南岑), 정현(貞峴), ○○성에 웅거(雄據)했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많은 무리를 취합(聚合)하여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주둔(駐屯)하며 당과 신라 사람들을 노략질했다.

8월 26일, 임존성(任存城)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단지 작은 목책만 공격해 파괴했다.
9월 3일,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1만 병사로 사비성(泗沘城)에 머물러 지켰고 왕자 인태(仁泰),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는 7천 병력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 2천을 사비에서 배를 태우고 당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내마 중지(中知) 등도 동행했다.

9월 23일,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적과 싸우지 않고 항복한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려고 했다. 
성에 머무르며 지키고 있던 인원이 당과 신라 군사로 그들을 공격하니 도주했다. 
적이 퇴각하여 사비성 남쪽 고개로 올라가 4~5곳에 목책을 세우고 모여 주둔하며 기회를 엿보고는 성읍을 노략질했다. 
백제인이 배반하여 응한 곳이 20여 성이었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보냈다.

9월 28일, (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 황제의 조서를 전하려 문도는 동쪽 방면에 서고 대왕은 서쪽 방면에 섰다. 
황명을 내린 이후에 문도가 황제가 내린 재물을 왕에게 주려는데 홀연히 병이 들어 곧 사망했다. 
따라온 자가 문도의 자리를 대신해 그 일을 마쳤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례성(尒禮城)을 공격했다.
10월 18일, 이례성을 빼앗고 지킬 관리를 배치하니 백제 20여 성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했다.
10월 30일, 사비 남쪽 고개에 있는 군영의 목책을 공격해 1천5백 명을 참수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군주 필부(匹夫)가 그곳에서 전사했다.
11월 5일,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의 잠성(岑城)을 공격했다.
11월 7일, 비로소 승리하여 7백을 참수했다.

11월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공을 논하였다. 
계금당(罽衿=罽衿幢, 기병부대) 군졸이었던 선복(宣服)을 급찬으로 군사 두질(豆迭)을 고간으로 각각 삼았다.
또, 이번 전쟁에서 전사한 유사지(儒史知), 미지활(未知活), 보홍이(寶弘伊), 설유(屑儒) 등 네 명에게 차등을 두고 관직을 내렸다. 
백제인들도 모두 재주를 헤아려 임용했는데 좌평 충상(忠常), 상영(常英), 달솔 자간(自簡)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어 총관의 직무를 담당케 했고, 은솔 무수(武守)는 대내마 직위를 주어 대감의 직무를 담당하게 했으며, 은솔 인수(仁守)에게도 대내마 직위를 주어 제감의 직무를 담당케 했다.

​661년(재위 8년) 2월, 백제 잔적들이 와서 사비성을 공격했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迊湌)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돕게 했다.
또,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에게 그를 돕게 했으며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삼고 무훌(武欻)과 욱천(旭川) 등을 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삼고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그들을 구원케 했다.

​3월 5일, 가는 길 중간에 이르러 품일은 휘하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으로 먼저 가서 숙영지(宿營地)를 자세히 살피도록 했다. 
백제 군사들이 진영(陣營)을 바라보니 정돈되지 않아 갑자기 출병하여 빠르게 공격하였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우리 군사들이 매우 놀라서 무너져 달아났다.
3월 12일, 대군이 와서 고사비성(古沙比城) 외곽에 주둔하다 진군해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한 달하고도 6일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했다.

4월 19일, 회군하여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의 부대를 선발대로 보내고 하주의 부대는 후발대로 따르게 했다.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과 만나 싸웠으나 패하고 퇴각했다. 
비록 죽은 자들이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의 부대는 각산(角山)에서 적과 만나 진격하여 승리하여 마침내 백제가 주둔하고 있는 성에 들어가 2천 수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왕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흠순,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구원하여 그들을 돕게 했다.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이) 가소천(加召川)으로 물러났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군사를 돌렸다. 
왕이 여러 장군이 패한 것에 대한 죄를 차등 있게 주었다.

5월 9일 또는 11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 장군 생해(生偕) 함께 쳐들어와서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했다. 
포차(抛車)를 나란히 세워 돌을 날렸는데 성가퀴와 가옥들이 쉽게 무너졌다. 
성주 대사 동타천(冬陁川)은 사람을 시켜 철질려(鐵蒺藜)를 성 밖으로 던져 사람과 말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또 안양사(安養寺)의 식량창고를 부수어 그 목재를 날라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즉시 망루를 짓고 끈을 그물처럼 묶어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매달아 놓고 안쪽으로는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수비했다. 
이때 성 안에는 겨우 남녀 2천8백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리고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강한 대군과 대적하기를 무릇 20여 일이었다. 

​그러나 식량이 소진되고 체력이 떨어져 정성을 다해 하늘에 아뢰었는데 홀연히 적의 군영에 큰 별이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진동하여 적군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갔다.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벼슬을 대내마로 올려주었다.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로 옮기고 이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 대관사(大官寺)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의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 보였다.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무열이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서 장사지내고 존호(尊號)를 태종(太宗)으로 올렸다.
당 고종이 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

가족관계(태종 무열왕 가계도)

· 보량궁주
16대 화랑도의 풍월주인 보량의 딸이며, 미실의 손녀이다.
첫째딸 고타소를 낳고, 둘째를 낳다가 사망하였다.

· 고타소
태종 무열왕의 장녀. 남편은 품석.
642년(선덕여왕 11년), 대야성의 성주인 품석과 함께 대야성에 머물마 백제 윤충장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남편과 같이 처형되었다.

· 문명부인
본명은 문희이며,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둘째딸이다.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언니 보희대신 김춘추와 결혼했다.
30대 문무왕인 법민을 비롯해 6남 1녀를 낳았다.

· 법민
태종 무열왕의 장남. 30대 문무왕편 참고.

· 인문
태종 무열왕의 차남.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서예, 궁술, 말타기, 향악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동생 문왕과 번갈아 당나라에 볼모와 외교관으로 가있으면서, 당나라에서 좌령군위장군이라는 직함을 얻는등 능력을 발휘했다.
백제가 멸망한뒤 소정방과 당나라로 가서, 대당총관이 되어 김유신과 통일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당나라에 머물면서 여생을 보냈고, 694년 4월에 당나라 수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가 신라로 보내졌고, 효소왕(32대왕)은 태대각간의 벼슬을 추증했다.

· 보화부인
문명부인의 언니로 나중에 태종 무열왕과 결혼하였다. 아들과 딸 5남매를 낳았다.

주요사건
· 황산벌 전투와 관창
관창(官昌) 또는 관장(官狀)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용모가 우아했고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다. 
16살에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여 대감 직위에 어떤 이가 태종대왕(太宗大王, 김춘추)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년) 경신년(庚申年)에 이르러 왕께서 군사를 출병하여 당나라 장군들과 함께 백제를 침공할 때 관창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대서 서로를 마주 보며 대치하자 (그의) 부친 품일이 이르러 말하길
"네가 비록 어리지만 뜻과 기백(氣魄)이 있다.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시기이다. 어찌 용맹함을 보이지 않겠는가?" 
관창이 대답하길 "알겠습니다!"
즉시 말을 올라 창을 비껴 잡고 곧바로 직진으로 돌진하여 말을 달리며 수 명을 죽였으나 저쪽의 군사가 많고 아군은 적어 적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보내졌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했는데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또한 용감하니 (그를) 가엽게 여기어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곧바로 한탄하며 말하길 "신라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군사들이 많구나! 
어린 병사도 더욱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사들은 어떠하겠는가!" 곧장 그를 살려 보내주었다. 
관창이 말하길 "지난번 내가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 장수를 베거나 수기(手旗)를 뽑지 못하여 매우 한스럽도다. 
다시 적진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손수 우물물을 한 움큼 마시고 나서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힘을 다해 싸웠다. 

​계백은 (관창을) 사로잡아 머리가 베어 (그의) 말안장에 묶어 보내주었다. 
품일은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말하길 "내 아들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는 일에 죽을 수가 있어 후회하지 않는다." 
삼군은 이를 보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뜻을 세워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대왕은 그에게 급찬(級飡)의 직위에 추증하고 예로 장사를 지내주었으며 그의 가족에게는 부의(賻儀)로 당나라 비단 30필, 20승포 30필, 곡식 1백 석을 하사했다.

태종 무열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태종 무열왕은 첫 진골출신 왕이자, 신라 중기시대를 여는 왕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삼국통일이 시작되었다.

동시대에 고구려는 보장왕이 재위하였고, 백제는 의자왕이 재위하다가 660년에 멸망하였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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