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1대 시조 온조왕(始祖 溫祚王)
출생 ? ~ 28년 2월
재위 B.C 18년 10월 ~ 28년 2월(25년 11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
생애
온조왕은 부여 해부루 출신의 우태와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의 아들이다.
소서노는 졸본 사람으로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보다 8살 연상이고, 주몽과 재혼하였다.
주몽이 태자를 유리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니, 소서노는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의 신하와 함께 십제(백제)를 세우고, 소서노와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터를 잡았다.
B.C 16년 9월, 북쪽의 말갈이 백제를 침입했지만 물리쳤고, 15년 8월에는 동쪽의 동예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는다.
이후 말갈은 지속적으로 백제를 침략하였으나, 백제가 물리치자 B.C 8년에는 동예와 손잡고 백제의 증산 목책을 파괴하고 1백명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온조왕은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말갈과 동예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한편 이무렵 소서노와 비류는 그곳에 있던 낙랑과 갈등을 빚고, 온조에게로 오게된다.
온조는 비류세력이 오는것을 탐탁치 않아했고, 두 세력은 위례성에서 군사적 충돌을 하게되는데, 그 사이에서 소서노가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비류는 어머니의 사망을 한탄하며 자결하게 된다.
이후 온조는 죄책감과 내란 후유증으로 위례성을 버리고 한성으로 도읍지를 옮긴다.
백제시대 모형
B.C 1년, 동예는 비어있던 위례성을 점령하고, 성곽을 불태워버린다.
이듬해 10월 말갈까지 습격해왔으나 온조는 칠중하에서 물리쳤고, 추장 소모를 생포한다.
그리고 동예에 대해 보복을 하기위해 동예 우둔산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폭설로 좌절되었다.
4년 8월에는 말갈에 대비하여 북쪽에 성을 쌓았고, 6년 7월에는 남쪽 웅천에 목책을 세웠다.
하지만 남쪽의 마한과 외교적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철거하게 되었고, 온조는 마한을 복속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8년 10월, 온조는 사냥을 핑계로 군대를 이동하여 마한의 궁성을 습격한다.
기습을 받은 마한은 힘없이 무너졌고, 온조는 그곳의 주민을 한강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을 차지한 온조는 10년 7월부터 대두산성을 쌓고, 전국을 동, 서, 남, 북부로 4부체제를 확립하고 국가기상을 세웠다.
하지만, 우박, 지진등 기근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마한 잔여세력이 16년 10월 우곡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온조는 5천의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온조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18년 7월 탕정성을 쌓고, 8월에는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대다수의 부역을 없앴다.
22년 9월, 말갈이 술천성과 부현성을 습격하여 1천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자 온조는 기병 2백을 급파하여 부현성을 구하고 말갈군을 격파한다.
온조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한강 이북에 거점을 마련하고, 한강 동북방의 15세 이상의 장정을 동원하여 위례성을 수리하고 병력을 주둔시킨다.
이후 한동안 말갈의 침입은 없었다.
온조는 이렇게 백제의 기틀을 갖추는데 힘을 쏟다가 28년 2월 생을 마감하였고, 신하들은 온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온조왕 기록
주요사건과 인물
· 백제의 요서진출과 산둥반도 진출설
중국의 역사서 '통서'를 보면, 백제가 요서와 산둥지역을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서노가 처음에 주몽을 떠나 두 아들을 데리고 육지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보다는 소서노 집안 자체가 상인가문이라 중국과도 교역을 했을것이므로, 뱃길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남쪽에는 말갈족도 있고, 다른 부족들도 많은데, 소서노의 재산과 그녀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가로질러서 육로로 이동하는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뱃길로 중국 산둥지역에 정착하고, 교역을 통해서 나름 그 지역에서 기반을 잡고, 그후에 바다를 통해 미추홀(인천)로 가서 비류가 정착하고, 한강을 따라 위례성으로 온조가 터를 잡았을것이 타당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다만, 요서와 산둥지역에 백제가 진출했다기보다는 교역과 상업으로 그 지방에 유지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 비류세력과의 갈등과 소서노의 사망
고구려 유리와의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한강부근에 도착한 그들은 소서노와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자리잡고, 온조는 위례성에 자리를 잡게된다.
미추홀에 자리잡은 소서노와 비류세력은 그곳에 있던 낙랑세력과 갈등을 겪게되고, 온조가 있는 위례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온조는 비류세력이 오는것을 탐탁치 않아했고, 이런저런 핑계로 돌아갈것을 권유했다.
이에 소서노는 다섯 장군과 함께 위례성을 기습하지만,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비류는 소서노의 죽음을 한탄하며 자결하고, 온조는 죄책감과 민심동요등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 13년(B.C 6년) 봄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머니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가족관계(온조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다루왕
온조왕의 아들. 이름은 남아있지 않고, 2대 다루왕편 참고.
온조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온조왕은 고구려 유리왕과의 왕위다툼에서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였다.
그와중에 어머니인 소서노와 비류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국가의 기틀을 잡으려 노력하였다.
동시대에 신라는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이 재위하였고, 고구려는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이 재위하였다.
백제 왕 계보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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