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3대 기루왕(己婁王)
출생 ? ~ 128년 11월
재위 77년 9월 ~ 128년 11월(51년 2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2남
생애
기루왕은 다루왕의 아들이며, 33년(다루왕 6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77년 9월 다루왕이 사망하자 백제 3대 왕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기루왕에 대해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기루왕은 재위시절 주변 국가 침략은 한번밖에 없었다.
85년(기루왕 9년) 1월에 신라 국경을 침입한 것이 유일하다.
105년 1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고, 신라 파사 이사금은 제의를 받아들였다.
108년에는 말갈족이 우곡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약탈했으나, 방비만 했고 보복은 하지 않았다.
125년에 말갈의 침략을 받은 신라가 도움을 요청하자 5명의 장군 부대를 선발하여 신라를 도왔다.
이렇듯 기루왕은 주변국과 크게 문제없이 지냈지만, 정작 천재지변과 이상기후가 문제였다.
89년(기루왕 13년) 6월, 지진이 발생하여 땅이 갈라지고 가옥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가 났고, 이듬해(90년) 봄에 가뭄이 들어 보리에 싹이 나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나무가 뽑힐 정도의 태풍이 들어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93년에는 황악에 큰 바위가 5개나 굴러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고, 99년 8월에는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
10월에는 우박이 내려 또다시 농작물 피해가 있었다.
108년 봄과 여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111년 3월과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116년(기루왕 40년) 6월에는 홍수가 들어 한강이 범람해 가옥이 유실되어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였다.
홍수사태는 한달동안 이어졌고, 7월이 되어서야 복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기루왕은 51년 재위동안 천재지변에 시달리다가 128년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묘호는 기루왕(己婁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기루왕 기록
주요사건
· 두마리의 용
삼국사기에는 두가지의 기록이 있다.
기루왕 21년(97년) 용 두마리가 한강에 나타났다.
기루왕 27년(103년) 왕이 한산에 사냥을 가서 신비로운 사슴을 사로잡았다.
기본적으로 용은 왕을 상징한다.
기루왕은 33년(다루왕 6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44년 뒤인 77년에 왕이 되었다.(기루왕 나이 최소 44세이상)
그리고 20년뒤인 97년이면 최소한 기루왕 나이가 64세이상이 되는데, 이때 한강에 용 두마리가 나타났다는것은 장남이 반정을 일으킨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6년뒤인 103년에 왕이 신비로운 사슴을 잡았다는것은 반정세력을 진압했다는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것으로 추측된다.
즉, 기루왕은 97년에 장남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고, 6년뒤에 다시 왕위를 되찾은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기루왕의 나이는 최소한 70세이상이고, 25년뒤인 95세이상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여러 왕후와 여러 아들이 있었음이 가능하다.
가족관계(기루왕 가계도)
· 왕후, 후비, 장남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위의 두 마리의 용을 토대로 한 추측이다.
· 개루왕
기루왕의 아들. 이름은 남아있지 않고, 4대 개루왕편 참고.
다루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기루왕은 재위시 주변국에게는 관계는 화친으로 대응했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동시대에 신라는 탈해왕, 파사왕, 지마왕이 재위하였고, 고구려는 태조왕이 재위하였다.
백제 왕 계보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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