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출생 ? ~ 661년 6월
재위 661년 6월 ~ 681년 7월(20년 1개월)
가족 부인 3명, 자녀 3남
생애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661년 6월, 태종 무열왕이 사망하자 신라 30대 왕에 올랐다.
모친은 김씨 문명왕후이고, 소판(蘇判) 서현의 막내딸이며, 김유신의 누이이다.
그의 언니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정상에 올라서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나라 안에 두루 흘렀다.
깨어나서 막내에게 꿈을 말하자 막내가 장난치며 말하길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살게" 그리하여 비단 치마를 주고 값을 치렀다.
여러 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를 밟아 옷의 단추가 떨어졌다.
유신이 말하길 "우리 집이 다행히도 가까이에 있으니 청하건대 우리 집으로 가서 단추를 꿰매시지요."
그리하여 유신의 집으로 함께 갔다. 술상을 차리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들고 와서 꿰매도록 했다.
언니가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여 막내가 앞으로 나와 꿰매었다.
담백하게 화장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웠으며 보희를 환하게 비추었다.
춘추가 이를 보고 기뻐하며 곧장 혼인을 청했고 예식을 치렀다.
곧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출산했는데 이가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의 외모는 걸출하고 특별했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 당나라 고종이 태부경(太府卿)에 제수했고, 태종무열왕 원년 파진찬으로 병부령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660) 태종 무열왕과 당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은 그들을 따라 공을 많이 세웠고 이때에 이르러 즉위했다.
661년(재위 원년) 6월, 당으로 들어가 황제를 숙위하던 인문과 유돈(儒敦)등이 이르러 왕에게 고하길
"황제가 이미 소정방에게 수군과 육군 35도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왕에게도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에 서로 응하게 하였으니 비록 상중이라도 엄중한 황제의 칙명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7월 17일,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인문, 진주, 흠돌(欽突)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천존, 죽지, 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上州摠管)으로,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총관(下州摠管)으로,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을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 달관(達官), 문영을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으로, 진순(眞純)을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을 낭당총관(郎幢摠管)으로,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衿大監)으로 각각 삼았다.
8월,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 이르러 머물렀다.
사신이 와서 고하길 "백제 잔적들이 옹산성(甕山城)에 웅거하며 길을 막아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먼저 사신을 파견해 그들을 타일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9월 19일, 대왕의 부대가 나아가 웅현정(熊峴停)에 머무르며 여러 총관과 대감을 모아 친히 그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9월 25일, 진군하여 옹산성을 포위했다.
9월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 지르고 수천 명을 참살하니 마침내 그들이 항복했다.
공적을 논해 각간과 이찬 중에 총관으로 있는 자에게는 칼을 하사하고,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 총관으로 있는 자에게는 창을 하사했으며 그 이하 직위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품계씩 올려주었다.
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했다.
상주총관 품일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과 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과 함께 병사들을 거느리고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해 1천여 급을 베었다.
백제 달솔 조복(助服)과 은솔 파가(波伽)가 여러 무리와 의논하여 함께 항복했다.
조복에게 급찬의 지위를 내리고 거듭해서 고타야군(古陁耶郡) 태수로 제수했다.
차가에게도 급찬의 지위와 아울러 논밭, 집, 의복, 재물을 하사했다.
10월 29일, 대왕이 당 황제가 보낸 사신이 도착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도읍으로 돌아왔다.
당 사신이 조의를 표하고 위로했으며 아울러 칙명으로 전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여러 가지 색이 있는 비단 500단도 하사했다. 유신 등은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고 이후의 명을 기다렸다.
함자도총관(含資道揔管)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칙서를 전하며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였다.
662년(재위 2년) 정월, 당 사신이 객관에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했다.
이찬 문훈을 중시로 제수했다.
왕이 유신과 인문, 양도 등 9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실어 평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1월 18일, 풍수촌(風樹村)에서 숙박했다.
얼음이 얼어 길이 미끄럽고 험해져 수레로 군량을 수송할 수가 없어 모두 소와 말에 적재했다.
1월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䔉壤)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병과 만나 그들을 습격해 죽였다.
2월 1일, 유신 등이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평양에서 3만 6천보 거리이다.
보기감(歩騎監) 열기(裂起)등 15명을 당 군영으로 먼저 보냈다.
이날 눈보라가 세차게 불고 몹시 추워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2월 6일, 양오(楊隩)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군량을 전달했고,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세포 30필, 두발 30냥, 우황 19냥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받고 곧장 출정을 마치고 귀환했다.
유신 등은 당 군대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𤬁川)을 건너자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해와서 군사를 돌려 맞서 전투를 벌였다.
1만여 수급을 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逹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수만을 얻었다.
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宫)의 재물, 논밭, 노비를 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하사했다.
영묘사(霊廟寺)에 화재가 났다.
탐라국주(躭羅國主)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진(津)이 와서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武徳, 당 고종 연호 618~626) 이래로 백제의 신하국으로 예속되었기에 좌평 관직을 호칭으로 사용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3월, 대사면령을 내렸고, 왕이 이전 백제를 평정한 일로 해당 부서에 명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7월, 이찬 김인문이 당으로 가서 조공했다.
8월, 백제 잔적들이 내사지성(内斯只城)에 모여 주둔하면서 나쁜 짓을 일삼으니 흠순 등을 19명의 장군을 보내 그들을 토벌케 했다.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거짓 병을 핑계로 (나랏일을) 등한시하고 내버려 두며 국사를 돌보지 않아 마침내 그들을 주살하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했다.
사찬 여동(如冬)이 모친을 구타(毆打)하여 하늘에서 우레가 치며 비가 내렸고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몸 위에 수○당(湏𠸈堂)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663년(재위 3년) 정월, 남산신성(南山新城)에 긴 창고를 건설하고, 부산성(冨山城) 축조했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 거열성(居列城) 공격하여 빼앗고 수급을 7백여 급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 공격하여 그곳을 항복시키고 또 덕안성(徳安城) 공격하여 수급 1,070을 베었다.
4월, 당이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계림주대도독 (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내렸다.
663년(재위 3년) 5월, 백제부흥운동.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이하여 왕으로 옹립하고 낭장 유인원이 머무르며 지키던 웅진성(熊津城)을 포위했다.
당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아 전(前) 도독이었던 왕문도(王文度)의 군사와 우리 군사들과 함께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했다.
옮겨 다니며 전투를 하는 곳마다 적의 진영(陣營)을 함락시켜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무리가 없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웅진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복신이 도침을 죽여 그 무리들을 합쳤고 배반하여 도망간 자들을 불러 돌아오게 했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장대(張大)했다.
인궤와 인원은 연합하여 갑옷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했고 병력을 더해줄 것을 청했다.
당 황제는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이르렀다가 웅진성으로 나아가게 했다.
왕은 김유신 등 장군 28명을 또는 30명 거느리고 그들의 군사와 연합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 또는 두량윤성(豆良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내어 도주했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항복했으나 지수신(遅受信)만이 홀로 임존성에 웅거(雄據)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10월 21일부터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 또는 후리정(后利停)에 이르러 공적을 논하여 차등 있게 상을 주고 대사면을 내렸다.
의복을 만들어 성에 머무르며 지키는 당군에게 배급(配給)했다.
664년(재위 4년) 정월, 김유신이 연로하여 퇴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아찬 군관(軍官)을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으로 삼았다.
하교하여 부인들 또한 중국 조정의 의복을 입게 했다.
2월, 해당 부서에 명해 여러 왕릉원에 각 20호씩 백성들을 이주토록 했다.
각간 김인문과 이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 부여융과 함께 웅진에서 동맹을 맹세했다.
3월, 백제의 잔여 무리가 사비산성(泗沘山城)에 웅거하며 항전하니 웅주도독(熊州都督)이 군사를 내어 그들을 격파했다.
지진이 발생했고, 성천(星川), 구일(丘日) 등 28명을 웅진부성으로 보내 당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7월,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하여 일선과 한산 두 주의 군사와 웅진부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여 그곳을 함락했다.
8월 14일, 지진으로 민가가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절에 재물과 논밭을 시주(施主)하도록 금지했다.
665년(재위 5년) 2월, 중시 문훈(文訓) 연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이찬 진복(眞福)을 중시로 삼았다.
이찬 문왕이 죽어 왕자의 예로 장사지냈다.
당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아울러 자주색 옷 한 벌, 허리띠 한 개, 채색 비단 백 필, 무늬 비단 2백 필을 주었다.
왕도 당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8월, 왕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이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盟約)을 맺었다.
예전에 백제 부여장(무왕)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연합하여 여러 차례 우리의 강역을 침범했다.
우리가 사신을 보내 당에 입조하여 구원을 청했고 구원병이 길에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뒤 군대를 돌리자 남은 무리가 또 모반하여 왕이 진수사(鎮守使) 유인원과 유인궤 등과 함께 수년 동안 다스려 점차적으로 그들을 평정했다.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조서를 내려 돌아가서 나머지 무리들을 위무하게 했고 더불어 우리와 화친하도록 명했다.
이때에 이르러 백마를 잡아 맹약했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그 이후에 그 피를 서로 마셨다.
그 맹약의 명문은 이러하다.
지난날 백제 선왕은 미혹하여 순리를 거스르고 이웃과 돈독(敦篤)하게 지내지 않았고 친인척과도 화목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통교하며 함께 잔인한 폭도(暴徒)가 되어 신라를 침공하여 점점 빼앗고 고을을 약탈했으며 성의 백성들을 살육하니 대체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하나의 미물이라도 잘못되면 가엽게 생각하시고 죄 없는 백성들을 가련(可憐)하게 생각하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화평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백제는 험준한 지세에 기대고 거리가 먼 것을 믿어 하늘이 정한 올바른 이치를 거만하게 업신여겼다.
황제는 이를 두고 크게 분노하여 삼가 백제 정벌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깃발이 서있는 곳마다 한 번의 전투로 평정되었다.
거듭하여 궁궐과 집을 헐어 웅덩이로 만들어 후대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도록 하였고 근본을 뿌리뽑고 폐단을 막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게 했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들을 품고 모반하는 자들은 정벌하는 것은 예전 왕들이 법으로 정한 것이며,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이 옛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規範)이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반드시 옛 규범을 삼아야 한다고 여러 가지 옛 책에 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고향 땅을 보존(保存)하게 하였다.
신라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오랫동안 동맹국이 되어 각자의 오래된 원한을 덜어내고 화친을 맺어 각자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영원히 번복(藩服)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을 파견하여 친히 가게 하여 권유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을 진실로 선서(宣誓)하게 하였다.
혼인으로 약속하고 거듭 맹세하며 희생물을 잡아 피를 나누어 마셨다.
한결같이 함께 돈독(敦篤)하게 지내고 재앙은 나누며 어려움이 있으면 구휼하여 형제처럼 사랑하라.
황제의 말을 공경하게 받들어 감히 실추시키지 않으며 맹세를 한 후로 함께 굳게 지켜나가라.
만약 맹세를 저버려 지켜야 할 덕을 지키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무리를 움직여서 변경을 침범한다면 천지신명이 그것을 살펴 온갖 재앙을 이곳에 내려 자손을 양육하지 못하고 사직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서철권(金書鐡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며 자손만대 감히 이를 위반하지 말게 할 것이다.
천지신명께서 이를 들으시고 이 제물을 받으시어 이곳에 복을 주시옵소서." 유인궤가 이 맹세문을 썼다.
피를 나누어 마시고 제단 북쪽 방향의 땅에 제사에 바치는 희생(犧牲)과 폐백(幣帛)을 묻고 우리의 종묘에 금서철권을 간직했다.
이때 유인궤가 우리 사신 및 백제, 탐라, 왜인 등 4국의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서 모여 제사를 지냈다.
왕자 정명(政明, 31대 신문왕)을 태자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겨울 일선과 거열 두 주의 백성에게 하서주(河西州)에 군수물자를 나르게 했다.
비단과 베가 예전에는 10심(尋)이 1필이었으나 길이 7 보와 폭 2척을 1필로 고쳤다.
666년(재위 6년) 2월, 도읍에 지진이 발생했고, 4월에는 영묘사에 화재가 나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모두 내마의 관직으로 당으로 가서 숙위했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했으니 고구려를 멸하고자 당에 군사를 청했다.
12월, 당 황제가 이적(李勣)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揔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安陸) 출신 학처준(郝處俊)을 그의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귀족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 동생)가 성 12곳 763가호 3,543명을 거느리고 와서 투항했다.
정토와 그를 따르는 관리 24명에게 옷, 재물, 식량, 살아갈 집을 주고 왕도 및 주와 부에 배치하여 편히 살게 했다.
그중 8곳의 성은 온전하여 모두 사졸들을 보내 성에 머무르며 지키게 했다.
667년(재위 7년) 7월, 큰 연회를 3일 동안 베풀었다.
당 황제가 칙서를 내려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쟁으로 향하도록 했다.
왕은 즉시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을 삼았다. 황제는 또 조서를 내려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을 삼았고 왕은 궁궐의 뜰에서 황제의 칙명을 받들라고 명했다.
대내마 즙항세(汁恒世)를 보내 당나라에 조공했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종군케 하고 또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로 종군케 하여 평양에서 만나도록 했다.
8월,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읍을 떠나 출정했다.
9월, 한성정(漢城停)에 이르러 영공(英公, 당 이적의 작호)을 기다렸다.
10월 2일, 영공이 평양 북쪽 2백 리 거리에 이르러 이동혜 촌주(尒同兮 村主) 대내마 강심(江深)을 시켜 보내었는데, 거란 80여 기병을 거느리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지나 한성에 이르렀다.
출병하는 시기를 독려하는 글을 전하니 대왕이 그것을 따랐다.
11월 11일, 장새에 이르러 영공이 회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 또한 군사를 돌렸다.
그리하여 강심에게 급찬의 직위를 주고 조(粟) 5백 석을 하사했다.
12월, 중시 문훈이 죽었다.
머무르며 성을 지키던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했는데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 하고 거듭해 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하사했다.
668년(재위 8년) 봄,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했다.
원기(元器)와 연정토를 당으로 보내었고 연정토는 그곳에 머무르며 돌아오지 않았으며 원기는 돌아왔다.
칙명으로 지금 이후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3월, 파진찬 지경을 중시에 제수.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이어서 명하길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
4월, 혜성이 천선(天船, 별자리 이름)의 자리를 지켰다.
6월 12일, 유인궤가 황제의 직서를 받들어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이르렀다.
왕이 각간 김인문을 시켜 엄중한 예의를 갖추어 마중하게 했다.
이때 우상(유인궤)이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했다.
6월 21일,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 흠순, 천존,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총관으로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총관(京停摠管)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이찬 인태를 비열도총관(卑列道摠管)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으로,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으로, 파진찬 의복, 아찬 천광을 서당총관(誓幢摠管) 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을 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으로 각각 삼았다.
6월 22일, (웅진)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관등) 미힐(未肹)을 파견해 고구려 대곡(大谷)과 한성 등 2군 12성이 귀순했다고 고했다.
왕이 일길찬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했다.
인문, 천존, 도유 등이 일선주 등 7군과 한성주의 군사와 말을 거느리고 당 군영으로 향했다.
6월 27일, 왕이 도읍을 출발해 당 군영으로 향했다.
6월 29일,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을 출발했다.
왕은 김유신이 중풍을 앓고 있었기에 도읍에 머무르게 했고 인문 등이 영공과 만나 영류산(嬰留山) 아래로 진군했다.
7월 16일 왕이 한성주에 행차해 여러 총관들에게 하교하여 군을 이끌고 가서 당나라 대군과 회합하도록 명했다.
문영 등 고구려 군사들과 사천(虵川)의 벌판에서 만나 맞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 21일, 당나라 대군과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했다.
고구려 왕이 천남산(泉男産) 등을 먼저 보내 영공에게 항복을 청했다.
이때 영공은 보장왕(寳臧王)과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끌고 당으로 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는 영공을 따라 돌아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도 함께 따라갔다.
처음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왕이 한성을 출발해 평양으로 가다 힐차양(肹次壤)에 행차했는데 당 여러 장수가 이미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668년(재위 8년) 10월 22일,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직위를 하사하고, 인문에게 대각간 그 외에 이찬 장군 등에게는 모두 각간으로 삼았으며, 소판 이하모두 한 자급(資級)씩 직위를 더해주었다.
대당소감(大幢少監) 본득(本得)은 사천(虵川) 전투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전투에서 성 안에서 군주 술탈(述脫)을 죽인 공이 제일이며 흑악령(黒嶽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이 제일이었기에 모두 일길찬의 직위를 제수하고 조 1천 석을 하사했다.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 평양 군영에서 전공이 제일이어서 사찬의 직위를 제수하고 조 7백 석을 하사했다.
군사(軍師) 남한산(南漢山) 출신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공이 제일이니 술간의 직위에 제수하고 쌀 1천 석을 하사했다.
군사(軍師) 부양(斧壤) 출신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전투에서 공이 제일이니 술간의 직위에 제수하고 7백 석을 하사했다.
가군사(假軍師) 비열홀(比列忽) 출신 세활(世活)은 평양의 작은 성 전투에서 공이 제일이니 고간의 직위에 제수하고 쌀 5백 석을 하사했다.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김상경(金相京) 사천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공이 제일이니 일길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조 1천 석을 하사했다.
아술(牙述) 출신 사찬 구율(求律)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가서 적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으나 군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위태로운 길로 적진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비록 공이 제일이라고 하나 기록하지 않는다.
구율은 분하고 한스러워 목매어 죽으려고 했으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조해 죽지 못했다.
10월 25일, 왕이 돌아가는 중에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했는데 국원(國原)의 사신(仕臣)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연회 자리를 만들어 왕과 여러 따르는 사람들을 대접했다.
풍악이 시작되자 내마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이 15살로 가야의 무용(舞踊)을 뽐냈고 왕이 그를 보고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아름다워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고 금잔으로 술을 권하며 재물과 비단을 자못 후하게 하사했다.
11월 5일, 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천을 이끌고 도읍으로 들어갔다.
11월 6일 왕이 문무 신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을 배알하며 고했다.
"선친의 유지(遺志)를 공경하게 받들어 당나라와 함께 의롭게 거병하여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에게 죄를 주어 나라의 운수가 태평하고 안정되었습니다.
감히 이곳에서 고하니 천지신명께서 이를 들어주시옵소서!"
11월 8일, 전사자들 소감 이상에게는 10○○필 그 밖에 따라 전사한 자에게는 20필을 하사했다.
12월, 영묘사에 화재가 났다.
669년(재위 9년) 정월, 신혜법사(信惠法師)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았다.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자석(磁石)을 구하라는 천자의 명을 전했다.
2월 21일, 대왕이 군신들을 모아 하교하길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떠 있어 북쪽에서 공격해오고 서쪽에서 침공해오니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참전한 병사들의 유골이 드러나 벌판에 쌓이고 (전사자의) 몸과 머리가 나라 사이의 경계에 나누어졌다.
선왕께서 백성들이 잔혹하게 해를 당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제후의 귀중한 지위를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입조하여 당에 군사를 청하셨다.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하고 영원히 전투를 없게 하며 여러 대에 걸쳐 눈처럼 깊게 쌓인 원한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온전하게 하시고자 하셨다.
선왕께서는 비록 백제는 평정하셨으나 고구려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셨는데 과인은 선왕께서 적들을 무찔러 나라를 안정되게 하시려는 유지를 이어 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완성했다.
지금은 두 적은 이미 평정되었고 사방이 고요하고도 태평하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자에게는 모두 상으로 보답하고 전사한 영혼들에게는 명복을 빌고 재물도 주었으며 벼슬도 추증해 주었다.
다만 감옥에 투옥되어서 읍고(泣辜)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죄인의 목에 긴 나무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는 고통 받으며 다시 새로워진 혜택(惠澤)을 입지 못했다.
이 일을 말하거나 생각하면 자고 먹는 것이 편안하지가 않다. 나라 안의
죄인들을 사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총장 2년(669년) 2년 2월 21일 동이 틀 무렵 이전까지 오역(五逆)의 죽을죄 이하를 범한 자들로 지금 현재 감옥에 갇힌 자들의 죄가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모두 방면하도록 하라.
그 이전에 사면 받은 이후 죄를 지어 작위(爵位)를 박탈(剝奪) 당한 자는 모두 예전대로 회복하길 명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오직 그 몸은 풀어주고 배상을 하게 하되 돌려줄 재물이 없을 경우에는 징수하는 기한(期限)을 두지 말게 하라.
그 백성들 중 몹시 빈곤하여 다른 사람의 곡식을 취한 경우 곡식이 여물지 않은 땅에 사는 경우에는 이자와 원금 모두 반드시 돌려주지 않아도 되며 곡식이 잘 여문 곳에 있는 경우에는 올해 여물은 곡식을 수확할 때에 이르러 오직 그 원금만 돌려주고 그 이자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 30일의 기한을 두고 해당 관청에서 받들어 시행토록 하라!"
5월, 천공(泉共) 비열(列忽) 각연(各連) 등 세 곳의 군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급찬 기진산(祇珍山)을 당나라로 파견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으로 파견해 사죄케 했다.
겨울, 당 사신이 도착하여 황제의 조서를 전하고 쇠뇌 전문가 사찬 구진천(仇珍川)와 함께 당으로 돌아갔다.
나무 쇠뇌를 만들게 명령했는데 화살을 쏘니 30보 날아갔다.
황제가 묻기를 "내가 듣기로는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보 날아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30보 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찌 된 것이냐?"
이에 대답하길 "목재가 불량하기 그렇습니다. 만약 목재를 본국에서 가져온다면 곧장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 그것을 구하도록 하였고 즉시 대내마 복한(福漢)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곧 다시 만들라 명했고 쏘아보니 60보가 날아갔다.
황제가 그 까닭을 물었고 대답하길 "신 또한 그러한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며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천자가 고의로 제대로 만들지 않다는다 의심하여 중죄를 줄 것이라 겁박했으나 끝내 그의 능력을 다해 바치지 않았다.
말 우리를 전부 174곳에 나누었다.
해당 부서 내 22곳과 궁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7명에게 각 3곳, 이찬 5명에게 각 2곳, 소판 4명에게 각 2곳, 파진찬 6명과 대아찬 12명에게 각 1곳, 그 이하 74곳은 알맞은 곳에 하사했다.
670년(재위 10년) 정월, 당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했고 양도는 억류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결국에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멋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취했기 때문에 황제가 질책하고 분노하여 재차 사신을 억류했던 것이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 말갈 부대가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4일, 맞서 전투를 벌여 아군이 그들에게 대승을 거두어 참수하고 사로잡은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군이 이어서 이르니 아군은 퇴각하여 백성(白城)을 지켰다.
6월,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모잠(牟蠶)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 거두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였다.
신라로 향하는 도중 서해의 사야도(史冶㠀)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뵙고 한성 안으로 맞이하여 임금으로 받들어 모셨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보내 애처롭게 고하길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대의(大義)이니 대국에서 이를 헤아려 주시기를 희망(希望)합니다.
우리 선왕이 도리를 잃어 멸망 당했지만 지금 신 등은 나라의 귀족 안승을 임금으로 삼고 받들었습니다.
원하옵건대 번국(蕃國)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왕은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했다.
한기부에서 여인이 한 번에 3남 1녀를 출산하여 곡식 2백 석을 하사했다.
7월, 왕이 백제 잔여 무리들이 다시 모반을 꾀할 것을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로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그들은 따르지 않았고 웅진도독부는 곧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몰래 엿보게 했다.
왕은 모반할 것을 알아차리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보내지 않았으며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토벌했다.
품일, 문충, 중신(衆臣), 의관(義官), 천관(天冠) 등은 63곳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우리 영토 안으로 이주시켰다.
천존과 죽지 등은 7곳의 성을 빼앗아 2천 수급을 베었다.
군관과 문영은 12곳의 성을 공격하여 적병을 물리쳐 7천 수급을 베고 성을 빼앗았으며 전투마와 병기를 노획한 것이 심히 많았다.
왕이 돌아와 중신, 의관, 달관(達官), 흥원(興元) 등은 ○○사(寺)로 군영에서 퇴각하여 죽을죄에 해당하지만 용서하여 면직(免職)시켰다.
창길(倉吉), 우○, ○○, ○일에게는 각각 급찬의 직위에 제수하고 차등을 두어 곡식을 하사했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했다. 그 책문은 이러하다.
함형원년(咸亨元年, 670년) 경오년 8월 1일 신축일 신라왕은 고구려 대를 이을 안승에게 명을 내린다.
공의 태조 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북쪽 산에다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는 공을 세우니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쳐 현토(玄菟, 현토군으로 고구려를 뜻함)에 인자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자손이 대를 계속 잇고 고구려 왕실이 오랫동안 후손들이 끊어지지 않으며 번성하여 천리의 땅을 개척한지 장장 8백 년이다.
남건(男建)과 남산(男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의 불화로 재앙이 일어나 골육 간의 틈이 생겨 집안과 국가를 망하게 하고 종묘와 사직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백성은 동요되어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피하다 이웃 나라에 단 혼자의 몸으로 투항했다.
정처 없이 떠돌며 고생스럽게 애를 쓴 일은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흥하게 하는 일들은 위(衛)나라 선공(宣公)와 같다.
무릇 백성들에게 주인이 없는 것은 옳지 못하며 드높은 하늘은 반드시 그들을 보살피라는 천명(天命)을 내린다.
선왕의 정상적인 후사는 오직 공뿐이니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공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나아가 공을 고구려왕으로 삼을 것을 명하니 공은 마땅히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위무하고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업을 이어서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 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며 공경하고 또 공경하라.
아울러 멥쌀 2천 석과 갑옷을 구비한 말 한 필, 비단 5 필, 명주와 삼베 각각 10필, 솜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이를 수령(受領)하여라."
12월, 토성이 달을 범하고 도읍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시 지경이 퇴직했다.
왜국이 국호를 고쳐 일본이라 했다.
스스로 말하길 해가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이름 지었다고 했다.
한성주총관 수세가 백제 ○○○을 빼앗았고 ○○○국. 때마침 일이 발각되고 대아찬 진주를 보내 그들을 주살했다.
671년(재위 11년) 정월,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제수했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그곳에서 전사했다.
말갈 군대가 와서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장차 퇴각하려는데 군사들을 출병시켜 그들을 공격해 3백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당 군대가 백제를 구원하고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을 보내 ○○군사들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가 ○○○○○○○○○○ 1촌이었다.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밟게 했다.
마침내 당군과 석성(石城)에서 전투를 벌여 5천3백 수급을 베고 백제 장수 2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직위의 6명을 사로잡았다.
7월 26일, 당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편지를 보내왔고, 문무왕이 답서를 보냈다.(편지와 답서는 생략)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 당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의 군사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깊은 해자를 파고 높은 보루를 쌓아 대방(帶方)을 침공했다.
10월 6일, 당나라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해 낭장(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사졸 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빠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급찬 당천(當千)의 공이 제일 컸기에 사찬의 직위를 주었다.
672년(재위 12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 공격해 승리했다.
2월, 백제 가림성(加林城)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7월, 당 장수 고간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근행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이르러 8곳에 군영을 짓고 머무르며 주둔했다.
8월, (당군이)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군사들을 진군시켜 백수성(白水城) 5백 보쯤 거리에 군영을 지었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급을 수천을 베었고 고간 등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그들과 전투를 벌였으나 아군이 패배를 당해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과 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과 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과 양신(良臣) 등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축조했는데 성의 둘레가 4,360 보였다.
9월, 혜성이 북방에 7번 나타났다.
왕은 지난번 백제가 당에 가서 참소(讒訴)하고 군사를 청하여 우리를 공격했을 때 일이 되어가는 형세가 급박하여 황제께 아뢸 수가 없어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당나라 조정에 죄를 지었습니다.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 내마 변산(邊山)과 억류되어 있는 수군 낭장(郎將) 겸이대후 (鉗耳大侯),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 군사 170명을 보내고 표문을 올려 죄를 빌며 말하길
"신 아무개는 죽을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옛날 신이 위급하여 그때 상황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습니다.
멀리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입어 도륙을 당하여 죽을 위기를 면했습니다.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문드러져도 황제 폐하께서 베푸신 넓은 은혜를 보답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머리를 부수고 재와 티끌을 만든다 하여도 어찌 황제께서 베푸신 자애로운 은혜를 우러러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뿌리 깊은 원수 백제가 우리의 경계 근처에서 핍박하고 천자의 군사를 자신들의 죄를 면하려 신을 멸하고 치욕을 씻으려 합니다.
신은 파멸의 위기에 처해 초조하여 스스로를 구하고 보존하고자 하였으나 원통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누명(陋名)을 쓰게 되어 마침내 죄를 용서받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은 두려워 일의 내용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형벌을 받고 죽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일의 상황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천자께서 귀 기울여 들어주시고 근본적인 연유를 밝게 살펴주십시오.
신은 전대 왕조 이후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고 근래에 백제가 재차 조공을 어그러지게 만들어 끝내 천자의 조정으로 하여금 말이 나오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신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여서 남산(南山)의 대나무로 신의 죄를 쓰기에 부족하며 포야(褒斜)의 숲으로도 신의 벌할 형틀을 만들기에도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허물어 못으로 만들고 신의 몸을 도륙하여 찢긴다고 하여도 일의 내용을 헤아려주시고 타일러 경계하여 주신다면 달게 여겨 죽음을 받겠습니다.
신의 관을 수레 옆에 두고 머리에 진흙이 마르지도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며 천자께서 내리시는 처분을 기다리고 삼가 명하신 형벌을 엎드려 받들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총명하심이 해와 달과 같고 용모에서 나오는 광채는 구석진 곳까지 비추어 모두가 은혜를 입게 하시고 덕은 온 세상을 합쳐 동식물이 모두 길러 주셨습니다.
죽을 형벌에 처한 죄인을 특별하게 살려주시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시는 인서(仁恕)의 덕은 조류와 물고기에게도 흘러 미칩니다.
혹시라도 제가 지은 죄를 자복하면 ⑸ 너그럽게 용서를 베풀어 주시어 허리와 목이 온전한 은혜를 내려주시고 비록 죽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일 것입니다.
희망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감히 마음에 품었던 것을 진술하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천(原川) 등을 보내 사죄의 표문을 올리고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려 죽을죄를 지었고 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울러 은 33,500푼, 동 33,000푼, 바늘 400매, 우황(牛黄) 120푼, 금 120푼, 40승포 3필, 30승포 60필을 조공했다.
이해에 곡식이 귀해져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렸다.
673년(재위 13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와 도성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强首)를 사찬으로 제수하고 해마다 조 200석을 하사했다.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했다.
6월, 호랑이가 대궁의 뜰에 들어와 그곳에서 죽였다.
7월 1일, 김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을 하여 당나라에 붙으려고 했으나 일이 새어나가 죽임을 당했으며 처자식은 천민으로 채워 넣었다.
8월, 파진찬 천광(天光)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했다.
9월, 국원성(國原城) 옛 완장성(薍長城) ,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또는 질암성(迭巖城)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축조했다.
왕이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했다.
당군과 말갈 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모두 9번 전투를 벌여 우리 군사들이 그들을 물리치고 2천여 수급을 베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울,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해 그들을 항복시켰고, 거란과 말갈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해 그곳을 멸했다.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설치했고 주에 2명 군에는 1명을 두었다.
예전 태종무열왕께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혁파(革罷)했었고 이때에 이르러 다시 설치했다.
674년(재위 14년) 정월, 당에서 황제를 숙위하던 대내마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익혀 돌아와 전하였고 새로운 역법을 개정(改定)해 사용했다.
왕이 고구려 모반한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사람을 시켜 막아 지키게 했다.
당 고종이 분노해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削奪)했다.
왕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은 당나라의 도읍에 있었는데 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귀국하도록 했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에게 인궤를 보좌케 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게 했다.
2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꽃과 풀을 심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동물을 키웠다.
7월, 태풍이 불어서 황룡사 전각이 무너졌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대규모 군사를 사열했다.
9월, 하명하여 의안법사(義安法師)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다.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
영묘사(靈廟寺) 앞에 나있는 길에서 병사들을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참관(參觀)했다.
675년(재위 15년) 정월, 동을 주조해 모든 부서와 주군에 인장(印章)을 나누어 주었다.
2월, 유인궤 칠중성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왕은 곧장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며 사죄했고 황제는 왕을 용서하고 다시 관작을 복귀시켰으며 김인문은 신라로 가는 도중에 당으로 돌아가고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했다.
그러나 많은 백제의 땅을 취했고 마침내는 고구려 남쪽 경계를 ⑴ 쳐서 주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대가 거란과 말갈과 함께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9군을 출병시켜 대비했다.
9월, 설인귀가 당에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부친 김진주가 신라에서
처형 당한 것을 이유로 풍훈을 끌어들여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서 전투를 벌여 승전하여 1,400여 수급을 베고 전투선 40척을 취했다.
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했으며 전투마 천필을 획득했다.
9월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買肖城)에 주둔했고 아군이 그들을 공격하여 퇴각시켜 전투마 30,380필을 획득하고 그 밖에 병장기도 그 정도 노획했다.
당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안북하(安北河)를 둘러 관(關)과 성(城)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축조했다.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겁박하고 노략질하니 성주 소나(素那)가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당군이 거란과 말갈군과 함께 침공해 와서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포위하여 그곳을 함락시켰다.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았으나 힘을 다하여 모두 전사했다.
당군이 또 석현성을 포위하고 그것을 빼앗았다.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그들과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사했다.
또 아군이 당군사와 크고 작은 18번 전투를 벌여 모두 승전했으며 6,047명의 수급을 베고 전투마 2백 필을 획득했다.
676년(재위 16년) 2월, 고승 의상(義相)이 왕의 조서를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했다.
7월, 혜성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사이에서 나타났고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당군사가 도림성(道臨城)으로 쳐들어와 공격하여 빼앗았고,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양궁(壤宮)을 지었다.
11월,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의 부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맞서 싸웠으나 아군이 패했다.
또 크고 작은 22번의 전투를 벌여 승리해 4천여 수급을 베었다.
재상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677년(재위 17년) 3월, 강무전(講武殿) 남문에서 활쏘기를 참관했다.
최초로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설치했다.
소부리주에서 흰매를 진상했다.
678년(재위 18년) 정월, 선부령(船府令) 1명을 두고 선박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좌리방부(左理方府)와 우리방부(右理方府)에 경(卿)을 각각 1명을 증원했다.
북원소경(北原小京, 원주)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吳起)에게 그곳을 지키게 했다.
3월, 대아찬 춘장(春長)을 중시로 제수했다.
4월, 아찬 천훈(天訓)을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으로 삼았다.
5월,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진상했는데 새의 깃에는 무늬가 있었고 종아리에는 털이 있었다.
679년(재위 19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사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經略)하게 했다.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자못 극도로 장엄하고 화려했다.
4월, 형옥성(熒惑星)이 우림(羽林) 자리를 지켰다.
6월, 태백이 달로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參大星)을 범했다.
8월,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東宮)을 처음으로 짓고 안과 밖에 있는 여러 문들의 편액에 쓰는 이름을 정했다.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완공되었다.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했다.
680년(재위 20년) 2월,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으로 제수했다.
3월 금은 그릇과 채색된 비단 백 단(段)을 보덕왕 안승에게 하사하고 마침내 왕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교서를 내려 하교하길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곧 먼저이고 왕이 교화함의 기본은 후사(後嗣)를 잇는 것이 주된 일이다.
왕은 아내가 남편의 집을 자기 집처럼 삼아 살아가며 비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고 남편을 내조(內助)하려는 마음도 있다.
오랫동안 비우는 것은 옳지 않으니 내조의 법도를 행하여 영원히 가업을 이어가는 일을 어그러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좋은 날과 길한 날을 헤아려 옛 법령을 쫓아 과인의 누이 딸과 배필이 되어 보덕왕은 마땅히 마음과 도리를 함께 두텁게 하여 조종의 제사를 예법에 따라 받들어 능히 자손을 무성하게 하며 반석(盤石)같이 영원히 번성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
5월, 고구려왕이 사신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길 "신 안승 말씀을 올리옵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이르러 하교하신 교지를 받들었습니다.
아울러 교서를 내리시길 이외로 조카 따님을 보덕국의 안주인으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거듭하여 4월 15일에 이 교서가 이르러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이 교차하여 품게 되어 어느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건대 황제의 딸을 규(嬀)에게 시집보내고 주(周)나라 왕의 딸을 제(齊)나라에 시집가도록 한 것은 본디 성스러운 덕을 드높인 것으로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상관(相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은 본디 용렬한 부류로 행실과 능력이 딱히 없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운수를 만나 왕께 성스러운 교화를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매번 특별한 은혜를 입어 보답하고자 하나 ⑽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듭하여 임금의 총애를 입었음에도 이와 같이 혼인할 친척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피어 경사스러움이 나타나고 엄숙하고 화목한 덕을 이루었습니다.
길한 달과 좋은 날에 ⑶ 변변치 않은 저희 집으로 시집보내신다고 말씀하시니 영원한 세월 동안 만나기 어려운 일을 거듭하여 하루아침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애초에 소망하지도 않았던 일이고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입니다.
어찌 오직 한두 부형(父兄, 문맥상 선대 왕들을 말하는 듯하다)들께서 진실로 그 베푸신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조 이하로부터 참으로 영예롭고 기쁜 일입니다.
신은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 조정에 나아가 찾아뵙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매우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지극하여 삼가 대장군 태대형(太大兄) 연무를 보내 표문을 바쳐 아뢰옵니다."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했다.
681년(재위 21년) 정월 초하루, 하루 종일 시커먼 어둠이 밤과 같았다.
사찬 무선(武仙)이 정예병 3천을 이끌고 비열홀(比列忽)을 지켰다.
우사록관(右司祿館)을 설치했다.
5월, 지진, 유성이 삼대성(參大星)을 범했다.
6월 천구성(天狗星)이 곤방(坤方, 서남쪽)에 떨어졌다.
왕이 도읍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고 승려 의상에게 묻자 대답하길
"비록 풀이 우거진 들판 초가집에 살지라도 올바른 도리를 행하면 곧 복된 왕업(王業)이 오랠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여 성을 짓더라도 역시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비로소 공역을 멈추었다.
7월 1일, 왕께서 돌아가셨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다.
군신들은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바닷가 어귀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민간 속설에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했다.
조서를 내려 유언하기를
"과인은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한 시기의 운명에 속하여 그때 당시 전쟁을 하며 서쪽으로 정벌하고 북쪽으로 토벌하여 강역을 안정시켰다.
모반하는 자들은 토벌하고 제휴(提携)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편안하게 했다.
위로는 선조들이 남긴 유언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怨恨)을 갚았다.
산자나 죽은 자에게 두루 추후에 상을 주고 중앙과 지방에 균등하게 작위를 내렸으며 병장기를 주조(鑄造)하여 농기구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어진 수명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다하였다.
세금을 적게 매기고 요역(徭役)을 줄여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했으며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하였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무성한 풀만 우거져 있으니 가히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음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움과 고생을 만나고 무릅썼으나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교화하느라 근심하고 노력하다가 다시 결국(結局)에는 더욱 병이 심해졌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늘 변하지 않는데 문득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어찌 한이 있겠느냐?
태자는 일찍이 은덕을 쌓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많은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여러 신료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배웅하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는 예를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두어서는 안되기에 태자는 즉시 관 앞에서 왕위를 이어 즉위하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도 달라지고 바뀌며 사람의 세대도 차차 변해 가는 것이니 오(吳)나라 왕이 북산(北山)의 묘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오리의 빛깔을 볼 것이며 위(魏)나라 왕의 서릉(西陵) 망루(望樓)에서는 오직 동작대(銅雀臺)라는 이름만 들린다.
가족관계(문무왕 가계도)

· 자의왕후
파진찬 선품의 딸이며, 보룡 소생으로 진골정통 계열이다.
보룡은 선품이 사망한후 무열왕을 섬겨 당원왕자를 낳았다.
그래서 자의는 무열왕의 총애를 받아 법민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 소명태자
문무왕의 장남. 665년 문무왕보다 먼저 사망해 왕위를 잇지 못했다.
· 정명
문무왕의 차남. 31대 신문왕편 참고.
· 신광부인
김유신의 딸이며, 법민이 태자에 오르기전에 결혼했다.
하지만 자의왕후때문에 후비가 되었다.
· 야명부인
태자 법민의 첩이 되어 왕자 인명을 낳았다.
· 인명
문무왕과 야명부인 사이에 태어나서 흠돌이란 인물이 문무왕이 사망하자, 인명을 왕으로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했고, 인명은 반란수괴로 지목되어 죽었다.
주요사건
· 고구려 멸망
668년 9월에 당나라 이적(李勣)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大行城)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淥柵)에 다다랐다.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契苾何力)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천남산(泉男産)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남건(男建)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은 군사의 일을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성을 불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문무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문무왕은 백제멸망후에 재위하여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사망후에는 동해바다를 지키려는 염원으로 바닷가 어귀에 장사를 지냈다.
동시대에 고구려는 보장왕이 재위하다가 멸망했고, 백제는 이미 멸망하였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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