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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by [悠悠自適] 2025.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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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출생 ? ~ 692년 7월
재위 681년 7월 ~ 692년 7월(11년)
가족 부인 2명, 자녀 4남

생애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政明), 자(字)는 일초(日怊)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로 모친은 자의왕후(慈儀王后)이고, 왕비는 김씨로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이했고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이후에 부친이 난을 일으킨 것에 연좌(緣坐)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뒤를 이어 즉위했다. 
당 고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을 그대로 물려받게 했다.

681년(​재위 원년) 8월, 서불한 진복(眞福)을 상대등으로 제수했다.  
8일, 소판 김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모반을 꾀하다 형벌을 받아 죽었다. 
13일, 보덕왕이 사신 소형 수덕개(首德皆)를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했다.

16일, 왕이 말하길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의 훌륭한 규범(規範)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형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전(法典)이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으로 덕이 부족하지만 후사를 이어 숭고한 사업을 지키기 위하여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여러 중신(重臣)들과 함께 국가를 편안하게 하려는데 어찌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리라 생각하겠느냐? 
역적의 수괴 흠돌, 흥원, 진공 등은 재주로 관직에 나아간 것도 아니고 벼슬을 실제로는 조상의 덕으로 인한 은전(恩典)으로 올랐는데 시종일관 능히 근신(謹愼)하며 부귀를 보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도리어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게 권세를 부려 거만하게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위아래로 기만(欺瞞)하고 능멸(凌蔑)했다.
날마다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가슴에 품은 못된 마음을 드러내고 그 포학한 마음을 방자하게 부려 흉악(凶惡)하고 간사(奸邪)한 놈들을 불러들였다. 
가까운 내시들과 어울려 재앙을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고 나쁜 무리가 악행을 위해 서로를 도와 기일을 정해 역모를 꾀하고자 했다.
과인은 위로는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종묘의 신령스러운 은혜를 입어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죄악이 가득 차서 역적모의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사람과 신령이 모두 버린 것이고 하늘과 땅에서도 용서(容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리를 어기고 풍속을 해치는 일에는 이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이때 병사들을 모아 불충한 무리들을 제거(除去)하고자 하니 혹자는 산과 골짜기에 도망가서 숨거나 혹자는 궁궐의 뜰에서 항복했다. 
그러나 불충한 무리를 따르던 잔챙이들까지도 모조리 찾아서 모두 죽이고 평정하였으며 3~4일간 역적의 수괴(首魁)를 사로잡아 모두 소탕했다. 
일이 부득이하게 되어 신료들과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기에 걱정되고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있음이 어찌 아침저녁으로 잊을 수 있겠냐마는 지금 이미 요사(妖邪)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근심거리를 없게 했으니 소집한 병마들을 마땅히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이를 포고하여 이 뜻을 알리도록 하라!"

28일, 이찬 김군관을 주살했다. 
교서를 내려 말하길 "윗사람을 섬기는 규범(規範)은 충성을 다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벼슬살이를 하는 관리의 도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병부령 이찬 김군관은 반열의 순서로 말미암아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과인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지 않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과인의 부족함을 메우지도 않았으며, 조정에 절개를 바치지도 않았고 과인의 명을 받으면 자신의 몸을 잊을 정도로 사직에 진심으로 정성을 표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역적 흠돌 등과 교류하며 역적모의를 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전에 발고(發告)하지 않았고 이미 나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이 국가를 위하는 일로 목숨을 칠 뜻도 없으니 어찌 엄중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법을 외람(猥濫)되게 하고 혼탁(混濁)하게 하고 있다. 
마땅히 그 무리들과 함께 물리쳐 후손들을 위해 징계(懲戒)하고자 한다. 
김군관과 그의 정실에게서 난 아들 1명을 자진(自盡)케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모두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라."
10월, 시위감(侍衛監)을 혁파(革罷)하고 장군 6명을 두었다.

682년(재위 2년) 정월, 신궁에 몸소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4월, 위화부(位和府)에 령(令) 2명을 두고 인재를 선발(選拔)하여 천거(薦擧)하는 일을 관장(管掌)하게 했다.  
6월,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경(卿) 1명을 두었다. 
또, 공장부(工匠府) 감(監) 1명, 채전(彩典)에 감(監) 1명을 두었다.

​683년(재위 3년) 2월, 순지(順知)를 중시로 삼았다.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부인으로 삼으려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게 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에게 납채(納采)를 보내게 하였는데, 예물 비단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장(醬), 메주(豉), 포(脯), 젓갈(醢)이 135수레, 벼 150수레였다.  
4월, 평지에 눈이 1척이 왔다.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보내 김흠운의 집에 이르러 작은 딸을 부인으로 책봉했다. 
그날 묘시(卯時) 파진찬 대상(大常)과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와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자의 아내와 딸, 그리고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 두 부(部)의 여성 각각 30명씩 함께 맞이하여 오게 했다. 
부인이 탄 수레가 좌우 시종과 관리 및 여성들로 매우 성대했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궁 안으로 들어갔다.
10월,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하사했으며, 도읍에 머무르게 하고 크고 좋은 집과 양질의 토지도 하사했다.

684년(재위 4년) 10월, 해질녘부터 새벽녘에 이르기까지 유성이 여기저기서 떨어졌다.
11월, 안승의 친족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켰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남은 사람들이 대문이 주살되는 것을 보고 관리를 살해하고 고을을 거점(據點)으로 삼아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 장수와 병사들에게 그들을 토벌케 했고 그들과 맞서 싸우다 당주 핍실(逼實)이 전사했다. 
성을 함락시키고 그 사람들을 국가의 남쪽 주군으로 이주시키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685년(재위 5년) 봄,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烈州, 거창) 백성들을 빼내어 청주(菁州, 경남 진주)를 설치하니 처음으로 9주(九州)가 갖추어졌고 대아찬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3월, 서원소경(西原小京, 충북 청주)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 
남원소경(南原小京, 남원)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곳에서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가 낙성(落成) 되었다.
4월, 망덕사(望德寺)가 낙성(落成) 되었다.

686년(재위 6년) 정월, 이찬 대장(大莊) 또는 장(將)을 중시로 삼았다.
예작부(例作府, 고려, 조선시대 공조-工曹)에 경(卿) 2명을 두었다.
2월, 석산(石山), 마산(馬山), 고산(孤山), 사평(沙平) 네 곳에 현을 설치했다.
사비주(泗沘州)를 군으로 삼고 웅천군(熊川郡)을 주로 삼았다.

​발라주(發羅州)를 군으로 삼고 무진군(武珍郡)을 주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기(礼記)]와 아울러 예악(禮樂)과 제도(制度)에 관하여 황제께 주청(奏請)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해당 관청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을 옮겨 적게 하고, 아울러 [문관사림(文舘詞林)]에서 규범(規範)과 경계(警戒)에 관계된 문장을 채택(採擇)하여 정리해서 50권을 만들어 하사해 주었다.

687년(재위 7년) 2월. 원자(元子)가 출생했다. 
이날 날씨가 음침(陰沈)하고 매우 어두었으며 천둥과 번개가 크게 쳤다. 
3월, 일선주(一善州)를 혁파(革罷)하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파진찬 관장(官長)을 총관으로 삼았다. 
4월, 음성서(音聲署,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 수장(首長)을 경(卿)으로 고쳤다. 

​대신들을 선조의 묘에 보내 제문(祭文)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며 아뢰길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려 선조에게 두 번 절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전(靈殿)에 아뢰옵니다. 
아무개는 변변치 못한 재주로 숭고한 사업을 이어받아 지키기 위하여 자나 깨나 근심하고 힘쓰느라 여유롭게 지내지 못했으며 조용히 살아가지도 못했습니다. 

종묘(宗廟)에서 돌보아 주심에 힘입어 하늘과 땅에 내려주시는 복을 보호하여 지니게 해주셔서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합니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진귀한 보물을 배로 실어 나르며 조공의 직분을 다하고 형벌과 송사가 모두 그치기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사이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도리를 잃어서인지 하늘에 비추어 도의가 어그러져서 별의 형상이 기이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화성(火星) 별자리가 아름다운 빛을 잃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깊은 골짜기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의 사신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않은 재물을 차리고 받들어 제사를 모시니 삼가 (선대 왕들의) 혼령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엎드려 바라옵건대 조그만 정성이라도밝게 살펴주시고 보잘것없는 이 몸을 가엽게 여겨 도와주시옵소서. 
사계절의 기후가 순조(順調)로워 오사(五事, 사람이 타고난 다섯 가지 바탕)의 징조(徵兆)에 허물이 없게 해주시고 농사가 풍년이 들고 역병은 사라지게 해주시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예의를 갖추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고요하고 평안하며 도적이 소멸되어 후손들에게 여유(餘裕)로움을 물려주고 많은 복을 영원히 받게 해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5월, 교서를 내려 문무관료전(文武官僚田)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사벌(沙伐)과 압량(歃良) 두 주에 성을 축조했다.

688년(재위 8년) 정월, 중시 대장(大莊)이 죽어 이찬 원사(元師)를 중시로 삼았다.
2월, 선부(船府)에 경(卿) 1명을 증원했다. 
689년 정월, 하교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혁파하고, 해마다 벼를 차등을 두어 하사하는 것으로 법으로 정했다.
윤 9월 26일, 장산성(獐山城)에 행차했고,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축조했다.
왕이 달구벌(達句伐)로 도읍을 옮기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690년(재위 10년) 2월, 중시 원사가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아찬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10월,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했다.
691년 3월 1일,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로 삼아 봉했다. 
13일, 대사면령을 내렸고, 사화주(沙火州)에서 흰 참새를 진상했으며, 남원성(南原城)을 축조했다.

692년(재위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칙서를 내려 말하길 "우리 태종 문황제께서는 신령스러운 공적과 성스러운 덕망으로 오랜 세월 매우 뛰어나셨다. 
이런 이유로 승하하신 날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너희 선왕 김춘추도 묘호를 같이 한 것은 더욱이 분수에 지나친 일이니 반드시 빨리 칭호를 고치도록 하여라." 
왕과 군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대답하길 "작은 나라 선왕 김춘추의 시호가 우연(偶然)하게 성조(聖朝)의 묘호와 서로 겹쳐 칙령을 내리시어 그것을 고치라 하셨습니다. 
신이 감히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왕 춘추를 생각해 보면 자못 어진 덕망이 있어 때마침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사를 행하여 삼한을 하나로 통일시켰으니 그 공적이 많지 않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선왕이 승하하셨을 때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존호(尊號)를 추증(追贈)하였습니다. 
성조(聖朝)의 묘호와 서로 겹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내려주신 교칙을 듣고 몹시 두려움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사신께서 대궐의 뜰에서 복명(復命)할 때 이처럼 황제께 고해주십시오." 
그 이후에 별다른 칙서가 다시 오지 않았다.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신문(神文)이고 낭산(狼山) 동쪽에서 장사 지냈다.

가족관계(신문왕 가계도)

· 폐비 김씨
소판(蘇判) 김흠돌의 딸.
태자시절에 혼인하였으나, 신문왕이 왕에 즉위한 해에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란이 실패하자 아버지는 죽음을 당하였고, 그녀 또한 왕비의 자리에서 쫒겨났다.

· 신목왕후 김씨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문왕의 형인 소명태자와 정혼한 사이였지만, 소명태자가 일찍 사망해서 혼인하지 못했다.
이후 동생인 신문왕과 혼인하여 왕비에 올랐다.

· 이홍
신문왕의 장남. 32대 효소왕편 참고.

· 흥광
신문왕의 차남. 33대 성덕왕편 참고.

· 근질
신문왕의 3남.
726년(성덕왕 25년)에 당나라에 조공 사절로 갔고, 당나라에서 낭장 벼슬을 받았다.

· 사종
신문왕의 4남.
728년(성덕왕 27년)에 당나라에 토산물을 바치기 위해 사절로 갔다.
그리고 당나라 국학에 신라 왕실 자제들을 입학시켜 줄것을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당나라에서 과의 벼슬을 받았으며, 숙위로 머물러 있었다.

주요사건
· 두번의 반란(김흠돌의 난, 대문의 난)
681년(​재위 원년) 8월 8일, 소판 김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모반을 꾀하다 형벌을 받아 죽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사위이자 조카로 김유신의 여동생 정희의 아들이다.
그리고 부인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이다.

흠돌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진공은 흠돌의 매형으로, 657년 30세의 나이로 제27세 풍월주였다.
그 덕분에 흠돌은 매형인 진공으로부터 풍월주 자리를 넘겨받았다.
흥원은 진평왕의 서자인 호원의 아들이고, 흠돌의 부하였다.
이런 이유로 화랑도는 흠돌의 사병으로 전락하고 만다.
제30세 풍월주 천관이 흠돌의 사위였고, 제31세 풍월주 흠언은 아들이었고, 제32세 풍월주 신공은 흠돌의 조카였다.
이런 화랑도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어머니인 자의왕후를 좋아했는데, 자의왕후가 흠돌을 거부하고 문무왕과 혼인하였다.
때문에 자의왕후와 흠돌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흠돌의 세력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자의왕후는 흠돌의 딸을 며느리(태자비)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하지만, 흠돌은 문무왕의 서자인 인명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했고, 태자비는 폐위되었다.

684년(재위 4년) 11월, 안승의 친족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 초기에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 유민들이 금마저의 관리를 죽이고, 주변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신문왕은 토벌대를 보내 진압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남쪽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에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에 박차를 가해 전국을 9주5소경으로 확립했다.

신문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신문왕은 통일이후 조직 정비 작업에 주력하였고, 이는 신라 국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신문왕시대에 최치원, 강수, 설총이 활동하던 시기였고,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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