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출생 ? ~ 702년 7월
재위 692년 7월 ~ 702년 7월(10년)
가족 기록없음
생애
효소왕(孝昭王)의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공(恭)이고, 신문왕의 태자이다.
모친은 김씨로 신목왕후이며 일길찬 김흠운(金歆運)의 딸이다.
692년 7월, 신문왕이 사망하자 신라 32대 왕에 올랐다.
당 측천무후가 사신을 파견해 조문(弔問)하고 제사(祭祀) 지냈다.
왕을 신라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으로 책봉하여 관작을 그대로 물려받게 했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이름을 고쳤다.
이는 왕의 존함을 범하기 때문이다.
8월,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왕에게 올렸다.
694년(재위 3년) 정월, 몸소 신궁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인문이 당에서 죽었는데 66세였다.
겨울 송악(松岳)과 우잠(牛岑) 두 곳에 성을 축조했다.
695년(재위 4년), 자월(子月)을 정월(正月)로 삼았다.
개원(愷元, 태종무열왕 막내아들)을 상대등으로 제수했다.
10월, 도읍에 지진, 중시 원선이 노환으로 사직했다.
서시(西市)와 남시(南市) 두 시장을 설치했다.
696년(재위 5년) 정월, 이찬 당원(幢元)을 중시로 삼았다.
4월, 나라 서쪽에 가뭄이 들었다.
697년, 완산주(完山州)에서 쌀이 많이 달린 벼 이삭을 진상했는데, 다른 이랑에서 이삭이 합쳐진 것이다.
9월,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698년(재위 7년) 정월,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총관으로 삼았다.
2월, 도읍에 지진이 나고 태풍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중시 당원이 노환으로 사직하자 대아찬 순원(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월,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와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사신을 접견했다.
7월, 도읍에 홍수가 났다.
699년(재위 8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두루 미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7월, 동해 바닷물이 핏빛이 되었다가 5일 만에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9월, 동해 바닷물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도읍에 들렸다.
병장기 창고 안에서 북과 뿔피리 소리가 저절로 울렸다.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황금 하나를 얻었는데 무게가 100푼이었다.
그것을 바치자 남쪽 변방 제일의 관직을 주고 벼 100석을 하사했다.
700년(재위 9년),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正月)로 삼았다.
5월, 이찬 경영(慶永) 또는 현(玄)이 모반을 꾀하다 형벌을 받고 죽었다.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월, 세성(歲星, 목성)이 달로 들어갔다.
701년(재위 10년) 2월, 혜성이 달로 들어갔다.
5월 영암군(靈巖郡)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이 공무를 소홀히 하고 개인적인 이익만 도모하여 형장 100대와 섬에 보냈다.
702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효소(孝昭)이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
가족관계(효소왕 가계도)

· 기록없음.
주요사건
· 효소왕의 외할아버지 김흠운의 공적
김흠운(金歆運)은 내밀왕(奈密王, 내물왕 신라 17대왕)의 제8대 손으로 부친은 잡찬(迊飡) 달복(達福)이다.
655년, 태종대왕께서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아 분노하여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출병하기에 이르러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는데, 이때 흠운은 집에서 묵지 않고 군사들과 함께 즐거움과 고생을 하였다.
백제의 땅에 이르러 양산(陽山) 아래 군영을 세우고 진군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백제군이 밤을 틈타 빨리 달려와서 동이 틀 무렵 보루를 타고 기어올라 침입하니 우리 군사들이 매우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군사들을 정비할 수가 없었다.
적군은 혼란스러움을 말미암아 재빨리 공격하여 화살이 비 내리듯 날아들었다.
흠운은 말을 비껴 타고 창을 쥐고 적을 기다렸다.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설득하길 "지금 적군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에서도 서로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공께서 비록 죽는다 하여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하물며 공께서는 신라의 귀한 골품으로 대왕의 사위이십니다.
만약 적의 손에 죽게 되면 백제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흠운이 말하길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기로 사람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매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성을 구하겠는가?" 굳세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는 자가 고삐를 쥐고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흠운은 칼을 빼들고 휘두르며 적과 싸우다 여럿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때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이 흠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하길
"저분은 골품이 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웠으며 사람들이 그를 아꼈음에도 오히려 절개를 지키다 전사했다.
하물며 보용나는 살아서 이로울 것이 없고 죽어서 손해될 것이 없다."
마침내 적진으로 나아가 서너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에 각각 추증했다.
당시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효소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효소왕 재위시에는 이미 통일이 되었기에 주변국과의 전쟁은 없었지만, 699년 동해바닷물이 핏빛이 되었다는 기록은 전투보다는 적조현상으로 추측한다.
또한 효소왕 역시 재위 말기 모반사건이 있었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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