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출생 1330년 5월 31일 ~ 1374년 11월 4일
재위 1352년 1월 22일 ~ 1374년 11월 4일(22년 9개월)
가족 부인 7명, 자녀 1남.
생애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과 명나라가 하사한 공민왕(恭愍王)이다.
고려식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이다.
27대 충숙왕(忠肅王)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의 둘째아들이자, 28대 충혜왕(忠惠王)의 친동생이다.
왕이 되기 전 이름은 왕기(王祺), 봉호는 강릉대군(江陵大君)이다.
1341년, 당시 고려 왕족들의 관례에 따라 원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으로 가 약 10년간 볼모(인질)로 지냈다.
이 시기 원나라 황실의 몰락을 직접 목격하며 반원 개혁의 뜻을 품었다.
1349년 원나라 황실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조카인 충목왕과 충정왕이 차례로 즉위하면서 왕이 될 기회를 놓쳤으나, 친원파의 득세로 고려 정국이 혼란해지자 1351년 원나라 황제의 지지를 얻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고려 제31대 왕으로 즉위하여 귀국했다.
1352년 1월 공민왕이 몽골식 변발과 호복(몽골 옷)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주적 전통을 살리는 개혁 정치의 서막을 엶.
10월 조일신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대신들을 살해했으나, 공민왕의 기지로 진압되고 조일신 역시 처형당함(조일신의 난).
1356년 6월 기철을 비롯한 대표적인 친원파 세력을 전격적으로 숙청하고,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며 반원 자주 개혁을 본격화함.
8월 원나라의 내정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유인우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99년 만에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함.
1359년 12월 사유와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여 서경(평양)을 함락시켰으나, 고려군이 격퇴함.
1361년 11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복주(안동)로 피난을 떠남.
1362년 2월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총반격을 감행해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완전히몰아냄.
1363년 4월 친원파 부하들이 피난에서 돌아오던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으나, 노국대장공주가 침실 앞을 가로막아 왕의 목숨을 구함(흥왕사의 변).
1365년 3월 공민왕이 가장 사랑했던 정실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던 중 난산으로 사망하자 공민왕이 깊은 슬픔에 빠져 정치를 멀리하기 시작함.
1366년 6월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 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함.
1371년 8월 권력이 비대해진 승려 신돈이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하면서 신돈의 개혁 정치가 중단됨.
1374년 11월 자제위의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이 침전에 침입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공민왕을 칼로 난자하여 시해함.
가족관계(공민왕 가계도)

●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본명은 보르지긴 부다시리(寶塔實里, 보탑실리)로, 칭기즈 칸의 7대손이자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다.
1349년 원나라 연경에서 당시 강릉대군이던 공민왕과 혼인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고려로 온 후, 남편의 반원 자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1363년 친원파 무리가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흥왕사의 변' 당시, 공주가 침실 앞을 가로막고 당당히 버텨 공민왕의 목숨을 구했다.
결혼 후 16년 동안 아이가 없다가 1365년 어렵게 임신했으나, 난산으로 인해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 혜비 이씨(惠妃 李氏)
고려 말의 대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이제현(李齊賢)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서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1359년(공민왕 8년) 명문가였던 경주 이씨 이제현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국공주의 견제와 공민왕의 무관심 속에서 혜비 이씨는 왕의 총애를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자녀(후사)를 두지 못했다.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홍륜 등)에게 시해당하자, 혜비 이씨는 곧바로 궁을 나와 머리를 깎고 비구니(승려)가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너간 뒤에도 살아남았고, 태조 이성계는그녀에게 ‘혜화궁주(惠和宮主)’라는 칭호를 내리고 예우해 주었다.
궁궐 밖 여승들의 처소인 정업원(현재 서울 종로구 소재)에서 지내다, 조선 태종 때인 1408년에 사망했다.
● 익비 한씨(益妃 韓氏)
본래 성은 한씨가 아니라 개성 왕씨로, 고려 현종의 후손인 덕풍군 왕의(王義)의 딸이다.
1366년(공민왕 15년) 정비 안씨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면서 공민왕으로부터 '한씨(韓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정신병(심질)을 앓던 공민왕은 후사를 얻기 위해 미소년 친위대인 '자제위'를 설치했다.
그리고 자제위 청년들에게 후궁들을 강간하여 아이를 베게 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후궁들(혜비, 정비, 신비)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거부했으나, 익비 한씨 역시 거절하다가공민왕이 칼을 뽑아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공포에 질려 어쩔 수 없이 지시에 따르게 되었다.
이후 익비는 자제위 중 한 명이자 명문가 자제였던 홍륜(洪倫)과 강제 및 상습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결국 1374년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공민왕이 죽은 후 익비는 홍륜의 딸을 출산했다.
그러나 우왕 2년(1376년), 조정 대신들이 "역적(홍륜)의 씨를 살려두면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태어난 딸은 결국 살해당했다.
● 정비 안씨(定妃 安氏)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우왕 시절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었던 안극인(安克仁)의 딸이다.
1366년(공민왕 15년) 익비 한씨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공민왕 말기 '자제위 사건' 당시, 혜비 이씨, 신비 염씨와 함께 왕의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며 정조를 지켜냈다.
공민왕 사후, 시비 반야의 아들인 우왕이 즉위할 때 그를 법적인 아들(적자)로 삼아 즉위를 공식 승인해 주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할 때, 정비 안씨는 왕실의 수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폐위 교서를 내렸다.
이성계(조선 태조)는 고려 왕조를 끝내 준 정비 안씨를 극진히 예우했고, 그녀에게 '의화궁주'라는 칭호를 내렸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시절인 1428년(세종 10년)에 세상을 떠났다.
● 신비 염씨(愼妃 廉氏)
본관은 파주(서원)이며, 고려 말기의 원로 정치가이자 문하시중(총리)을 지낸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에도 다른 후궁들에게서 후사가 없자,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11월에 후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다.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 일파에게 시해당하자, 신비 염씨는 큰 충격을 받고 궁궐을 나와 곧바로 머리를 깎고 승려(비구니)가 되었다.
1388년 우왕 시절, 그녀의 오빠이자 권력자였던 염흥방이 최영과 이성계의 정변(무진피화)으로 숙청당하면서 친정 가문이 멸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 궁인 한씨(순정왕후-順靜王后)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아버지는 훗날 면양부원대군으로 추증된 한준(韓俊)이다.
1357년(공민왕 6년) 공민왕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대전 궁인 출신이다.
한씨는 궁인으로 지내다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371년,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한 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般若)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모니노(훗날의 우왕)'를 정식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친모 반야는 노비 출신이라 태자의 어머니로 삼기에는 신분이 너무 낮았다.
이에 공민왕은 이미 사망한 대전 궁인 한씨를 우왕의 친어머니로 조작하여 입적시켰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1374년 우왕이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법적인 어머니인 그녀를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하고 시호를 내렸다.
우왕 2년(1376년)에 그녀의 무덤은 공민왕릉 근처인 의릉(懿陵)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1389년,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자식'으로 몰리자, 가짜 어머니였던 순정왕후의 의릉 역시 조정에 의해 강제로 철폐되었다.
● 시비 반야(般若)
반야는 공민왕 전반기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승려 신돈(辛旽)의 집 여종(시비)이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때 신돈의 소개로 반야를 만나 동침하게 되었고, 1365년 아들 '모니노(훗날의 우왕)'를 낳았다.
공민왕은 아들을 왕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으나, 반야의 신분이 너무 낮아(노비 출신)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우려했다.
이에 공민왕은 이미 사망한 명문가 출신의 후궁 '궁인 한씨(순정왕후)'를 우왕의 친어머니로 조작하여 입적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진짜 친모 반야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밤중에 공민왕의 장모(명덕태후) 처소로 뛰어들어 "내가 밤낮으로 피땀 흘려 낳아 기른 내 아들을 어찌 한씨의 자식이라 합니까!"라며 통곡하고 기절했다.
당시 권력자였던 이인임 등은 왕실의 비밀을 묻기 위해 반야를 즉시 체포하여 임진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 모니노(32대 우왕)
주요사건과 인물
● 기철 등 친원파 세력 숙청(1356년 6월)
내용 공민왕이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부원배 기철, 권겸, 노책 등 친원파 핵심 인물들을 연회에 초청하여 전격적으로 처형함.
결과 고려 내 원나라의 간섭 기반이 급격히 무너졌으며,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독자적인 자주 정치를 펼치기 시작함.
의의 원나라 세력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국왕 중심의 군주권을 회복하는 전환점을 마련함.
● 쌍성총관부 수복(1356년 8월)
내용 공민왕이 유인우를 동북면 장수로 임명하여 원나라가 99년 동안 불법 점령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인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하게 함.
결과 동북면 천호였던 이자춘·이성계 부자가 고려군에 호응하여 귀순함으로써 전투 없이 개원을 점령하고 한반도 동북방 영토를 완전히 되찾음.
의의 고종 대에 잃어버렸던 국토를 자력으로 되찾아 국경을 확장했으며,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 세력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 계기가 됨.
● 전민변정도감 설치와 신돈의 개혁(1366년 6월)
내용 권문세족에게 기반이 없던 여종의 아들 출신 승려 신돈을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권력자들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대로 되돌리는 개혁 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함.
결과 억울하게 노비가 된 수많은 양민이 해방되었고, 권문세족들이 숨겨둔 토지가 적발되어 국가 재정이 대폭 확충됨.
의의 고려 후기 누적된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경제·사회적 폐단을 척결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안정시킨 고려 말기 최대의 사회 개혁책임.
● 자제위 홍륜 일파의 공민왕 시해(1374년 11월)
내용 말년에 정신적으로 타락한 공민왕이 후사를 얻기 위해 미소년 친위대인 자제위를 설치하고 후궁들과 간통하게 함.
자제위 홍륜이 익비 한씨를 임신시키자 왕이 이들을 죽이려 했고, 이를 눈치챈 자제위와 환관 최만생이 술에 취해 잠든 왕을 칼로 난자함.
결과 공민왕이 45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10세의 어린 나이였던 우왕이 수장 없는 조정의 혼란 속에서 왕위에 오르게 됨.
의의 고려 왕조를 살릴 수 있었던 마지막 개혁 군주가 사라짐으로써 고려의 자정 능력이 상실되었고, 이는 18년 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됨.
공민왕 재위당시 연표

고려 왕 계보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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