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출생 1315년 3월 2일 ~ 1344년 1월 15일
재위 1330년 2월 26일 ~ 1332년 3월 29일, 1339년 5월 11일 ~ 1344년 1월 15일(복위)(6년 7개월)
가족 부인 4명, 자녀 3남1녀.
생애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의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휘는 '부다시리'(寶塔失里).
제27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제31대 공민왕의 친형이다.
1325년(11세)에 정식으로 고려의 세자로 책봉,
1328년(14세)에 당시 고려 왕실의 관례에 따라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로 가 숙위(볼모) 생활을 시작했다.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학문이나 정치 공부는 멀리하고, 대륙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격구, 사냥,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세자 시절을 보냈다.
1330년(16세)에 아버지 충숙왕이 조정 내부의 갈등과 원나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뜻을 밝히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다.
제1기 재위 기간(1330년 2월 26일 ~ 1332년 2월 23일)
1330년 2월 부왕인 충숙왕이 원나라의 압박과 조정의 정치적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며, 세자였던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줌.
3월 충혜왕이 원나라 영종(조지발)으로부터 정식 고명을 받아 제28대 고려 국왕으로 즉위함.
5월 즉위 직후 서해안 일대에 대규모로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방비 태세를 점검함.
윤7월 원나라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엘 테무르(연철) 세력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원나라 황족 출신의 덕녕공주(이린진발)와 정식으로 혼인함.
1331년 2월 왕이 직접 격구와 매사냥 등 유흥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궁중 예산을 사치 부리는 데 탕진하여 관료들의 상소가 빗발침.
8월 고려 조정 내부에서 충혜왕의 자질을 문제 삼은 친원파 세력(조적 등)이 원나라 조정에 충혜왕의 비행을 고발하는 서한을 보냄.
1332년 1월 원나라 조정이 충혜왕의 실정(국정 문란)과 기행을 이유로 옥새를 강제로 회수하고, 충혜왕을 원나라 수도(대도)로 압송함.
2월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즉위 2년 만에 폐위되었으며, 상왕이었던 부왕 충숙왕이 다시 고려 국왕으로 복위함.
제2기 재위 기간(1339년 5월 11일 ~ 1344년 1월 15일)
1339년 5월 부왕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자, 충혜왕이 다시 고려 국왕으로 복위(제2기 재위 시작)함.
9월 정승 조적(曺頔) 등이 심양왕 고(暠)를 옹립하기 위해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궁궐을 습격하는 '조적의 난'이 발생했으나, 충혜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진압하고 조적을 처형함.
10월 충혜왕이 부왕의 몽골인 후비였던 경화공주(慶華公主)를 강간하는 전대미문의 악행을 저지름.
부끄러움을 느낀 경화공주가 원나라로 도망치려 하자 그녀를 영안궁에 감금함.
1340년 4월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 일행이 경화공주로부터 충혜왕의 만행을 전해 듣고,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 대도로 압송함.
11월 원나라의 실권자였던 바얀이 실각하면서 충혜왕은 가까스로 처벌을 면하고 옥새를 돌려받아 고려로 귀국함.
1341년 11월 친원파 귀족인 기철(기황후의 오빠) 세력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기황후의 동생인 기륜의 집을 강제로 헐어버리는 등 부원배 세력과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빚음.
1342년 7월 남양 홍씨 가문의 딸을 새로이 화비(和妃)로 책봉했으나 불과 며칠 만에 방치함.
이에 기존 총애를 받던 노비 출신 임씨의 질투를 달래주기 위해 그녀를 은천옹주(오지옹주)로 책봉함.
1343년 3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대규모 신궁(新宮) 정비와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강제 노역으로 착취함.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궁궐 주춧돌 밑에 묻는다'는 괴소문이 도성 전체에 퍼져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짐.
12월 기철 등 부원 세력의 밀고와 거듭된 실정으로 인해, 원나라 사신 고용보 등에 의해 궁궐에서 정식 체포되어 다시 원나라로 압송됨.
원나라 순제는 백성의 고혈을 짠 죄를 물어 중국 남단의 게양현(揭陽縣)으로의 유배를 명령함.
1344년 1월 머나먼 유배 길을 가던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30세를 일기로 급사(독살설 혹은 병사)하며 최종 폐위됨.
왕의 사망 소식을 들은 고려의 백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부르며 기뻐함.
가족관계(충혜왕 가계도)

● 덕녕공주(德寧公主)
원나라 출신 공주. 본명은 보르지긴 이린진발이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후손(진서무정왕 초팔의 딸).
1330년 원나라에 체류 중이던 충혜왕과 혼인하여 함께 고려로 들어왔다.
남편 충혜왕의 극심한 기행, 폭력성, 그리고 끊임없는 성추문(선왕의 후비들을 강간하는 등)으로 인해 매우 고통스럽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1344년 충혜왕이 유배 길에서 사망하자, 그녀의 아들인 충목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이에 덕녕공주가 수렴청정(섭정)을 하며 고려의 정치를 주도했다.
1348년 아들 충목왕이 요절하자, 충혜왕의 서자(이복동생)인 충정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배후에서 실권을 쥐고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충혜왕 사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궁정을 이끌며 측근 신하들인 강윤충, 배전 등과 긴밀하게 지냈다.
이로 인해 궁궐 문에 이들과의 간통을 비난하는 익명서가 붙는 등 큰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원나라 출신의 '형수'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말년을 보냈다.
1375년(우왕 1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라는 시호를 받았다.
· 왕흔(29대 충목왕)
· 장녕공주(長寧公主)
원나라의 왕족인 노왕(魯王)에게 시집을 가 대륙에서 생활했다.
1368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원나라가 멸망할 때, 북평(지금의 베이징)에서 행방불명(실종)되었다.
어머니 덕녕공주의 하소연을 들은 숙부 공민왕이 명나라에 수소문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군대를 뒤져 북경에서 그녀를 찾아낸 뒤, 옷과 음식을 주어 1370년 고려로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당시 실권자였던 신돈 등은 "원나라가 망할 때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명나라의 포로가 되어 살아 돌아왔다"라며 비난하고 변방으로 쫓아낼 것을 주장했다.
다행히 공민왕이 이 주장을 물리치고 개경에 별궁을 마련해 주었으며,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딸 하나를 두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 희비 윤씨(禧妃 尹氏)
고려 출신의 명문가(파평 윤씨) 여성으로,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의 후손이다.
덕녕공주의 아들인 충목왕이 요절하자, 자신의 아들인 왕저(충정왕)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성공했다.
원나라 세력을 업은 정비 덕녕공주와 고려 외척 세력을 업은 희비 윤씨 사이에 치열한 권력 서열 다툼이 벌어지며 조정이 혼란했다.
권력 다툼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결국 3년 만에 숙부인 공민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아들 충정왕이 강화도로 유폐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민왕에게 눈물로 애원해 강화도로 직접 찾아가 며칠간 아들을 안아주고 돌아오기도 했다.
아들을 잃은 후 약 30년 가까이 홀로 더 살다가 1380년(우왕 6년)에 사망했다.
· 왕저(30대 충정왕)
● 화비 홍씨(和妃 氏洪)
본관은 남양이며, 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홍탁(洪鐸)이다.
과거 몽골에 투항했던 홍복원의 아우 홍백수의 손녀로, 원나라의 권세를 업고 고려 왕실의 비가 될 수 있었다.
1342년 충혜왕은 경상도 진변사로 나가 있던 홍탁의 딸이 아름답다는 소문만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이지도 않은 채 곧바로 화비로 책봉했다.
왕은 그녀를 재상 윤침(尹忱)의 집에 머물게 하며 내키는 대로 오갔으나, 불과 며칠 만에 흥미를 잃고 총애를 끊어버렸다.
이후 궁 밖에 방치된 채 쓸쓸히 지냈다.
그녀가 화비로 책봉될 당시, 기존에 총애를 받던 궁인 임씨가 격렬하게 질투하자 충혜왕이 임씨를 '은천옹주(오지옹주)'로 책봉해 달래주기도 했다.
●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본래 종실인 단양대군의 노비(여종)였으며, 거리에서 사기그릇(오지그릇)을 팔아 생계를 잇던 중 충혜왕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충혜왕의 수많은 여인 중 가장 사랑을 받았다.
그녀가 아들 왕석기(王釋器)를 낳았을 때는 왕이 기뻐하며 시장 상인들의 비단을 강제로 빼앗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또한 왕의 비공식 상업 활동을 대행하며 궁궐에 방아와 맷돌을 많이 설치하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1344년 충혜왕이 악행으로 인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 길에서 사망하자, 그녀 역시 궁궐에서 쫓겨나 몰락했다.
훗날 공민왕 시절인 1373년, 그녀의 아들 왕석기가 역모 사건(불궤도모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아들은 물론 옹주의 아버지인 임신(林信)까지 모두 참형을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왕석기(王釋器)
충혜왕과 은천옹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어머니마저 궁에서 쫓겨나면서 가문이 몰락했다.
이복형인 충정왕이 즉위한 후,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로 여겨져 머리를 깎고 만덕사(萬德寺)의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아 여러 사찰을 떠돌았다.
숙부인 공민왕이 즉위한 후인 1356년(공민왕 5년), 전 호군 임중보 등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 사건(임중보의 난)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처형되었고, 왕석기는 제주도로 유배(안치)가 결정되었다.
압송관들은 호송 도중 공민왕의 밀명에 따라 그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생존했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인 1375년, 숨어 살던 왕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었다.
1375년 음력 5월, 왕석기는 아들과 함께 안협에서 잡혀 끝내 사형을 당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사건과 인물
● 조적의 난 발생(1339년 9월)
내용 부왕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어받은 충혜왕이 의붓어머니인 경화공주를 강간하는 악행을 저지름.
이에 격분한 정승 조적 등 심양왕 파벌이 군사 1,000여 명을 모아 궁궐을 습격하고 충혜왕을 축출하려 했으나, 충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반란 세력을 제압하고 조적을 처형함.
결과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충혜왕과 반란 주모자들 모두 원나라 조정에 고발당해 대도로 강제 압송되었으며, 충혜왕은 원나라 관청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음.
의의 고려 국왕의 정통성을 흔들려 했던 심양왕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동시에 고려 왕실의 치부가 원나라에 고스란히 폭로되어 왕권과 국격이 크게 추락하는 계기가 됨.
● 편민조례추변도감 설치 및 개혁 시도(1340년 3월)
내용 충혜왕이 복위한 직후,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개혁 관청인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전격 설치함.
이 관청을 통해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추진함.
결과 기철을 비롯한 강력한 친원파 귀족 세력들의 불법 점유 자산을 압류하려 하자 기씨 일족의 강력한 반발과 원망을 샀으며, 결국 기황후 세력이 원나라 황실에 고발함으로써 충혜왕이 최종 폐위·유배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됨.
의의 비록 충혜왕의 폭정과 기행에 가려졌으나, 권문세족과 부원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도된 적극적인 제도적 개혁 노력으로 평가받음.
● 삼장과 소도축 금지 조치 및 국가 전매제 실시(1340년 ~ 1342년)
내용 충혜왕은 왕실 재정을 확보하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삼(麻)의 재배와 소 도축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킴.
이후 국가에서 이를 독점하여 비싸게 파는 전매제를 실시하는 한편, 이슬람(회회) 상인들에게 국가의 베(布)를 빌려주고 고리의 이자를 취하는 사채업을 직접 운영함.
결과 왕이 시장 상인들의 비단을 강제로 빼앗고, 의성창·덕천창 등 국가 창고의 포 4만 8,000필을 풀어 직접 도성에 대규모 시전을 열어 장사를 하면서 시중 상권을 완전히 장악함.
의의 국왕이 국가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보다 사적인 영리 활동과 시장 교란에 앞장서면서, 고려의 유통 경제가 마비되고 백성들과 일반 상인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음.
● 신궁(新宮) 대규모 토목공사와 주춧돌 괴소문(1343년 3월)
내용 기존 궁궐이 좁다는 이유로 엄청난 인력과 재정을 투입해 새로운 궁궐을 짓는 대형 토목공사를 강행함.
백성들을 강제로 징집해 노역을 시켰으며, 마구간을 짓는다는 핑계로 민간의 수레를 마구 부수어 자재로 사용함.
결과 이 무리한 공사 도중 도성 내에 "왕이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묻으려 한다"라는 끔찍한 인신공희 괴소문이 돌아, 전국의 부모들이 아이를 안고 산으로 도망치고 도성이 텅 비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함.
의의 국력을 생산적인 곳이 아닌 사치스러운 공사에 탕진하여 국가 재정을 파탄 냈으며, 민심이 왕실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됨.
● 원나라 사신 고용보의 기습 체포 및 최종 폐위(1343년 12월)
내용 충혜왕의 계속되는 실정과 원나라 가문(기철 일가)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자, 원나라 순제는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와 사신들을 파견함.
고용보 일행은 충혜왕에게 원나라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겠다며 연회를 베풀어 방심하게 만든 뒤,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충혜왕을 현장에서 기습 체포함.
결과 묶인 채 원나라 대도로 압송된 충혜왕은 황제로부터 "너의 죄는 네 피를 먹어도 부족하다"라는 군신 간의 극형에 가까운 질책을 받고, 중국 남단의 게양현으로 유배 가던 중 30세의 나이로 사망함.
의의 고려 역사상 국왕이 재위 중에 원나라 사신에게 물리적으로 기습 체포되어 압송당한 유일무이한 치욕적인 사건으로, 원간섭기 고려 왕권의 현주소와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충혜왕 재위당시 연표

고려 왕 계보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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