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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by [悠悠自適]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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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출생 ? ~ 371년 10월
재위 331년 2월 ~ 371년 10월(40년 8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2남

생애
고국원왕은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으로 아명은 사유(斯由), 이름은 소(釗)이다.
314년(미천왕 15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고, 331년 2월에 고구려 16대 왕이 되었다.
즉위하자 사당에 제를 올리고, 지방과 전국을 돌며  백성을 위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였다.
334년 평양성을 비롯해 동황성, 신성을 쌓고 국방에 대비하였다.
이는 모용 선비족이 연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남하정책을 의식한것이었다.

339년 연나라가 고구려 북쪽을 침입, 신성까지 밀고와서 동맹을 요구하자 이듬해 장남인 구부(소수림왕)를 연나라의 도성인 양안에 보내 동맹약조를 맺었다.
그럼에도 연나라는 고구려의 침입야욕을 버리지 못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342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보수한다음 일시적인 천도를 단행한다.
342년 11월 연나라 모용황은 5만5천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연나라는 군대를 모용황이 4만, 장사 왕우가 1만5천으로 나누어 진격했는데, 고국원왕은 동생 고무에게 4만, 자신은 1만의 군대로 방어했다.
고국원왕의 1만 군대는 모용황이 지휘하는 4만의 군사를 막지못해 도주했고, 많은 백성과 왕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왕자 고무가 지휘하는 4만의 고구려군은 연나라 왕우가 지휘하는 1만5천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이렇게 되자 모용황은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연나라는 돌아가는 길에 태후와 왕후를 비롯, 백성 5만을 포로로 잡아갔고, 선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가져간다.
이로인해 고국원왕은 태후와 왕후, 미천왕의 시신등으로 인해 신하국이 되겠다는 서약을 하게되었다.
치욕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후 343년 2월 미천왕의 시신은 돌아왔으나, 태후와 왕후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연나라가 중국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태후와 왕후가 볼모로 있는 상황에서 연나라의 팽창정책에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

348년 모용황이 사망하고 아들 모용준이 왕에 오르자, 고구려는 연나라 포로였던 송황을 보내고 공물을 바친후인 355년 12월 태후와 왕후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와 연나라는 별다른 충돌없이 지냈지만, 연나라 왕실은 사치와 향락으로 멸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연나라 서쪽에서 진나라가 세력을 확장하여 연나라를 압박하자, 고구려도 연나라로 진출하려했지만, 남쪽의 백제의 팽창으로 쉽지 않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369년 9월, 2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백제의 태자 근구수의 군사에 패해 5천을 잃고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370년 진나라가 연나라를 격파하자, 백제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에 박차를 가한다.

371년 9월 고구려는 백제를 선제공격했으나, 패하여 퇴각하였고, 백제는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다.
371년 10월 백제 근초고왕은 직접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급습한다.
기습을 받은 고구려는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고, 급기야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는다.
이에 태자 구부(소수림왕)가 군대를 통솔하고, 가까스로 평양성을 지켰지만, 고국원왕은 생을 마감한다.
능은 고국원 지역에 마련하고, 묘호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이라고 하였다.

 

주요사건
· 연나라의 침략
고구려와 연나라(모용 선비)는 서로 최대 적대국인데, 연나라는 끊임없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339년 연나라가 침입해 동맹을 요구하자, 장남 구부(소수림왕)를 연나라에 보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연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렸고, 이에 고구려는 환도성, 국내성등을 보수하고 대비하였다.
342년 11월 모용황은 5만5천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로 향하는 길은 남쪽의 험로와 북쪽의 평탄한 길, 2가지 였는데 모용황은 상식을 깨뜨린 전략을 취하였다.
4만의 군사는 모용황이 직접 이끌고 남쪽의 험로로 향했고, 1만 5천의 군사는 장사 왕우로 하여금 북쪽의 평탄한 길로 침략하였다.
이에 고국원왕은 동생 고무에게 정예부대 5만으로 북쪽의 평탄한 지역을 방어하고, 자신은 1만의 군사로 북쪽을 방어하였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패하고 도주하였고, 왕자 고무는 승리하여 적의 1만 5천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이렇게 되자 연나라 모용황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태후와 왕후,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헤쳐 가지고 돌아갔다.

· 백제의 팽창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이지만, 건국후 300년동안 서로 이렇다할 접촉은 없었다.
서천왕 17년이고, 백제 책계왕 원년인 286년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의 사이에 있던 대방을 공격하였다. 
당시 책계왕은 대방의 공주를 왕비로 삼았는데, 이에 대방을 도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다.
서천왕의 대방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고구려는 백제를 원망하게 되었다.
이후 83년동안 고구려와 백제는 거의 접촉이 없다가 369년에 적대관계로 만나게 되었다.

중국이 5호16국의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연나라 서쪽에서 진나라가 팽창하고 연나라를 압박하자 고구려도 연나라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남쪽 백제의 성장과 팽창으로 고구려는 백제에 집중하였다.
369년 9월 고구려가 2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의 군대에 패해 5천의 군사를 잃었다.
371년 9월 다시 백제를 선제 공격했으나, 오히려 백제의 복병에게 패해 퇴각하였다.
이에 여세를 몰아 10월, 백제 근초고왕이 직접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 와중에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는다.
고구려는 태자 구부(소수림왕)가 지휘하여 간신히 평양성을 지켜내지만, 고국원왕은 전사한다.

가족관계(고국원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고, 342년 11월 연나라의 침략때 시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연나라의 볼모로 끌려가서 355년 12월 고구려로 돌아왔다.

· 구부
고국원왕의 장남이자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소수림왕편 참고.

· 이련
고국원왕의 차남이자 고구려 18대 고국양왕.
고국양왕편 참고.

고국원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고국원왕은 북쪽의 연나라와 남쪽의 백제의 팽창으로 고구려의 어려운 시기를 보냈고, 급기야 평양성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최후를 맞게된다.

동시대에 백제는 비류왕, 계왕, 그리고 백제 전성기시대인 근초고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흘해왕과 내물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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