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by [悠悠自適] 2024. 11. 20.
반응형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출생 394년 ~ 491년 10월(향년 97세)
재위 412년 10월 ~ 491년 12월(79년 2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1녀

생애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거련이다.
394년에 태어났고, 409년에 태자에 책봉, 413년 10월에 20살의 나이로 고구려 20대 왕에 올랐다.
장수왕이 즉위시기에 중국 북방에서는 북연이 왕권교체가 되었고, 남방에서는 동진, 서방에서는 서진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국제정서를 안정화하기 위해 동진과 화친을 맺고, 북방의 북위와 북연을 견제하였다.
내부적으로는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이런가운데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동진은 송나라로 교체되어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430년 북연의 풍발이 죽자, 아우 풍홍과 아들 풍익이 왕위 다툼끝에 풍홍이 조카 풍익을 제거하고 북연의 왕으로 올랐다.
그러나 북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고 풍홍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요청을 받아들이고 풍홍을 받아들인다.
이에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북위로 압송할것을 요구하지만,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장수왕의 도움을 받은 풍홍은 얼마후 오만한 태도를 보이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볼모로 삼고 시종을 빼앗고 풍홍을 북풍지역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송나라는 이에 풍홍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수왕은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 풍홍과 가족 10여명을 참살하였다.
이에 송나라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명을 이끌고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생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풍홍의 군사를 진압하고 왕백구를 사로잡고 송나라로 압송시켰다.
송나라는 고구려의 압력에 왕백구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석방시켰다.

439년 북위가 북방을 통일시키고, 남방에 송나라와 함께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중원이 안정되자,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남진정책을 시작한다.
하지만 백제는 427년 이미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국경을 침략하여 국경의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 군사대응을 검토하자, 신라는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와 신라와의 나제동맹이 강화되자 장수왕은 454년 7월 신라의 북쪽을 공격하고, 이듬해 10월에는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나제연합군의 세력에 밀려 공격을 중지하였다.

466년 북위의 문명태후가 고구려에 공주를 시집보낼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장수왕의 딸은 이미 출가한 상태라 아우 승평의 딸을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장수왕의 신하가 북위와 북연이 혼인관계를 맺은뒤 북위가 북연을 공격한 예를 들면서 반대하자, 장수왕은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북위는 종실의 딸이라도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장수왕은 차일피일 미루는 시기에 북위의 왕권이 교체되어 무마되었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바둑에 능한 승려 도림을 첩자로 백제로 보낸다.


북위와 대등한 관계속에 내정을 안정시킨 장수왕은 468년 2월 말갈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는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된다.
469년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을 침략하였고, 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북쪽을 공격할것을 요청했지만 위나라는 거절한다.
이에 장수왕은 백제에 승려 도림을 잠입시켜, 백제 개로왕을 충동질시켜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이때문에 백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고구려는 475년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아차성으로 끌고가서 개로왕을 참수하였다.
이로써 장수왕은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복수를 하게되었지만, 신라의 1만군사의 원병으로 한성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옮겼다.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장수왕 재위 기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무렵 중원 남방의 송나라가 무너지고 제나라가 들어섰는데, 제나라는 고구려에 화친요구했다.
장수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신으로 여노를 보냈는데, 북위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여노를 붙잡았다.
이에 고구려와 북위가 대립했으나, 북위가 여노를 풀어주고 사태를 수습하였고, 장수왕은 제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이렇게 장수왕은 중원의 국가들과 대등한 외교를 맺고, 내정을 안정시켰지만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쓰며 남진정책을 하였다.
475년 백제의 수도 도성을 빼앗고 아리수로 진출, 486년에는 신라 호산성을 점령하여 남쪽의 영토를 확장했다.

장수왕은 이처럼 외교와 내정을 안정시키며 영토를 확장했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면서 무려 79년동안 재위하다가 491년 12월 9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수왕의 부고를 들은 북위의 왕 탁발원굉은 자신의 궁궐에서 애도식을 행했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장수왕의 능은 중국 지린성 장군총으로 추정되며, 묘호는 장수왕(長壽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장수왕 기록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용산)

반응형

주요사건
· 백제 정벌과 개로왕 참수
475년(장수왕 63년) 2월, 장수왕은 82살의 나이로 3만을 이끌고,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복수와 아리수 남쪽까지 영토확장을 위해 백제 정벌에 나선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것을 파악하고, 바둑에 능한 승려 도림을 첩자로 백제에 보냈다.
도림은 바둑을 내세워 개로왕에게 접근하였고, 개로왕을 부추켜서 궁궐을 증축하여 국고를 바닥내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내부사정을 보고했고, 장수왕은 3만의 군사로 백제 도성을 공격하였다.
개로왕은 뒤늦게 알아차렸고, 아우 문주에게 군사를 내주고 남쪽으로 피신하게 하고 자신은 도성에 남아 고구려군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백제 장수들이 고구려에 투항했고 개로왕은 남쪽으로 피신하였지만, 투항한 백제 장수 재증걸루에게 잡히게 된다.
재증걸루는 개로왕을 아차성 밑으로 끌고가서 참수하였다.
남쪽으로 피신한 개로왕의 아우 문주는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1만의 군사를 보내 한성 수복작전을 하였다.
고구려는 나제 연합군의 반격으로 한성을 포기하고, 포로 8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족관계(장수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없다.

· 조다(21대 문자명왕의 아버지)
장수왕의 장남이자, 문자명왕의 아버지.
아들 나운(문자명왕)을 얻은 후 일찍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공주
결혼을 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장수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에 뒤를 이어 국제적으로 대등한 관계속에 남진정책으로 백제 한성을 점령, 개로왕을 죽이고 증조부 고국원왕의 복수와 영토확장에 노력했다.

장수왕의 오랜 재위기간에 동시대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