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22대 안장왕(安臧王)
출생 ? ~ 531년 5월
재위 519년 ~ 531년 5월(약 12년)
가족 부인 1명, 자녀없음.
생애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흥안이다.
498년(문자명왕 7년) 7월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22대 왕에 올랐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중립외교정책을 이어받아 유지하여, 중국의 위나라와 양나라에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시기적, 거리적으로 고구려와 가깝다고 양나라의 단교를 요구하였다.
안장왕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적절히 이용하며 중립외교를 지켰다.
이러한 중립외교정책은 광개토대왕이후 추진되었던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백제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는데, 521년(무령왕 21년) 5월에는 홍수, 8월에는 메뚜기 떼로 농작물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9백여호의 백성이 신라로 이주했고, 10월에는 지진까지 발생하여 피해가 컸다.
이 상황에서 백제 무령왕은 고구려,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523년 2월부터 15세이상 장정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고, 무령왕은 그해 5월 생을 마감했으며, 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523년 8월, 고구려는 이같은 백제 상황을 틈타 백제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백제 지충이 이끄는 1만의 군대에 막혀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고구려의 공격을 막은 백제 성왕은 525년 신라 법흥왕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고, 신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단절되었던 나제동맹이 다시 복구되었고, 삼국의 관계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529년 10월, 고구려 안장왕은 직접 수만을 이끌고 백제의 요새인 혈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이에 백제도 3만의 군사로 오곡벌판에서 대혈전을 벌였다.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고, 백제는 2천명의 전사자와 수천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여세를 몰아 아리수(한강)를 넘어 공격하였고, 백제는 수성전을 하며 가까스로 버텼다.
2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백제는 수세에 몰렸고, 고구려는 많은 백제 지역의 영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531년 5월 고구려 안장왕이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는 철수 명령을 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묘호는 안장왕(安臧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안장왕 기록
주요사건
· 혈성전투, 오곡원 전투
고구려 북쪽의 위나라가 내부분열로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던 시기인, 529년 10월 안장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 북방의 요새인 혈성을 공격, 함락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병력 3만을 주어 방어했으나, 오곡원 지역에서 대패하였다.
여세를 몰아 고구려군은 아리수를 넘어 백세 도성까지 공격하였다.
계속된 전쟁에 백제는 수세에 몰렸고, 고구려는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 때문에 백제 성왕은 538년 옹진성(공주)을 버리고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게 된다.
가족관계(안장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자녀는 없었다.
안장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안장왕은 광개토대왕부터 이어오던 남진정책을 이어받아 백제를 공격하였고, 그결과 백제는 수도를 남쪽 사비로 옮기게 된다.
동시대에 백제는 무령왕과 성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법흥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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