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출생 ? ~ 519년
재위 491년 12월 ~ 519년(약 28년)
가족 부인 1명, 자녀 2남
생애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며, 이름은 나운이다.
장수왕 재위시절 장남이자 아버지인 조다가 사망했고, 장수왕이 사망하자 491년 12월 고구려 21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하자 위나라 왕인 탁발원굉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자를 보낼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왕자가 병이들었다고 거절하고, 종숙인 승간을 위에 보냈다.
이후 고구려와 위는 사신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고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북쪽에서는 물길이 부여를 침입해 부여성을 함락하고 일부를 병합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93년 2월 물길에 의해 함락된 부여의 왕이 가족을 데리고 투항해왔다.
이로써 수백년간 이어오던 부여는 완전히 몰락했다.
남쪽에서는 493년 7월 신라군이 북상해 대동강을 넘었다.
이에 고구려는 청천강 근처에 진을 치고 신라의 북상을 차단하고 반격, 견아성을 포위했지만 백제의 3천 원군에 의해 퇴각했다.
백제에 의해 신라 공격에 실패한 고구려는 이듬해 8월 백제 치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번엔 신라 원군에 의해 퇴각하고 말았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결혼동맹을 맺은 상태여서 서로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때문에 고구려는 쉽사리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기 쉽지 않았다.
고구려는 북쪽과 남쪽 동시에 경계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계속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495년 7월에는 신라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8월 다시 공격하여 우산성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휴전을 제안했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이고 백제 공략에 주력한다.
당시 백제는 계속된 가뭄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경제가 어려워 499년 8월 백제 백성 2천명이 고구려로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와 휴전한것을 비난하고, 동맹관계를 끊었다.
나제동맹의 결별은 고구려에겐 희소식이었으며, 백제 공략의 기회였다.
그러나 502년 8월 고구려에 메뚜기 떼가 몰려오는 바람에 농사를 망쳐 경제가 피폐해졌다.
설상가상으로 10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민심은 악화되었다.
백제는 이 기회를 틈타 11월 고구려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고, 이듬해 11월 5천의 군사로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어려운 내부사정으로 방어에만 주력해야만 했고, 위와의 교역이 줄어 위 왕실의 비난을 받았다.
문자명왕은 이러한 원인이 백제에 있다고 판단, 506년 11월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폭설로 인해 동사자가 늘어나 할수없이 퇴각했다.
이듬해인 507년 10월 장수 고로를 파견해 말갈과 함께 백제 한성을 공격했지만, 백제군에 밀려 퇴각하였다.
그후 문자명왕은 주변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며, 내부 안정에 주력하여 경제도 살리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이러한 내부안정은 국력강화와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졌다.
512년 9월 고구려는 백제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키고, 1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문자명왕의 즉위후 공식적인 첫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후 문자명왕 재위시에는 백제는 고구려를 침입하지 않았고, 재위 후반 7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다 생을 마감하였다.
문자명왕의 사망소식에 위나라 궁궐에서 영태후는 애도의식을 하였고, 사신을 보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묘호는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고 하였다.
주요사건
· 백제 가불성과 원산성 함락
문자명왕 재위시 고구려는 북쪽과 남쪽의 경계를 방어해야 했는데, 특히 나제동맹의 남쪽 방어에 어려움이 많았다.
곤충의 피해와 지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문자명왕은 내부안정을 우선으로 했다.
그리하여 내부가 안정되자, 512년 9월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불성과 원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포로 1천여명을 사로잡았다.
문자명왕의 첫 백제 전쟁 승리였고, 이후 문자명왕 재위시에는 백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았다.
가족관계(문자명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홍안
문자명왕의 장남이자 22대 안장왕. 안장왕편 참고.
· 보연
문자명왕의 장남이자 23대 안원왕. 안원왕편 참고.
문자명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문자명왕은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시대처럼 많은 전쟁을 하지는 않고, 외교와 내부안정에 주력하였다.
동시대에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소지왕, 지증왕, 법흥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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