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by [悠悠自適] 2024. 11. 19.
반응형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출생 374년 ~ 412년 10월(향년 39세)
재위 391년 5월 ~ 412년 10월(21년 5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2남

생애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담덕이다.
386년 12살에 태자에 책봉되고, 391년 5월 고국양왕이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19대 왕에 올랐다.
광개토대왕이 즉위시에는 후연, 후진, 서진, 후량등과 백제의 팽장등 혼란의 국제정세 상황이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과감한 팽창정책과 국력 증진에 주력하였다.

이러자 신라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 압박에 고구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392년 1월 내물왕의 조카인 실성(실성왕)을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는 이런 화진조약에 따라 392년 7월 4만의 군사를 보내 백제 요서군과 진평군 일대를 공격하였다.
또한 북쪽의 거란이 침략하여 1만의 고구려 백성을 잡아가자, 거란의 본토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거란은 겁을 먹고 달아났고, 포로 5백명과 1만의 백성을 환국시켰다.
또 10월 백제의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켰다.

백제는 관미성을 빼앗기자 고구려에 공격을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백제 진사왕은 향락과 사치에 빠져 이를 방관하였다.
이에 침류왕의 아들 아신왕이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393년 8월, 백제 아신왕은 숙부 진무에게 군사 1만을 주고 관미성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하였다.
394년 7월,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고구려는 남쪽 국경에 7개의 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395년 8월 다시 백제가 침략해오자 광개토대왕은 직접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백제군 8천을 죽였다.
그리고 회군하는 길에 고구려 변방을 노략질하고 백성을 잡아간, 거란족이 세운 비려를 토벌하고 백성들을 환국시켰다.

395년 11월, 백제 아신왕은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으나 폭설이 내려 회군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광개토대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396년 봄, 광개토대왕은 대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향해 일팔성을 비롯 50개 성을 점령하고, 아리수(한강) 이북을 장악하였다.
백제는 한강 이남은 넘지 못할것이라 생각하고 진을 펼쳤는데, 고구려군은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수성전을 펼쳤으나 고구려군을 막지 못했고,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광개토대왕은 아신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아신왕은 항복에 서약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으며, 백제 왕족과 대신 열명을 볼모로 보냈다.
백제 원정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한강 이북의 58개 성과 7백개 촌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하고, 그곳에 하평양을 건설하여 한반도 교두보로 삼았다.

광진구 아차산의 고구려정


한강 이북을 뺏긴 백제 아신왕은 영토 회복에 군대를 증강하고, 397년 5월 왜나라에 태자 전지를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또한 왜나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시키고, 고구려가 신라 원병을 보내면 그 기회를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399년 왜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신라 원병을 결심하였지만 후연의 모용성이 고구려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 함락시켜서 쉽사리 신라 출정을 떠나지 못했다.
서북 변방이 위험하자 광개토대왕은 신라 파병을 보류했는데, 신라 상황이 급박하자 400년 군사 5만을 신라로 보내고, 자신은 도성에 머물며 후연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고구려 5만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왜군은 황급히 신라에서 빠져나갔고, 고구려군은 왜군을 압박하여 내쫒았다.
이에 신라 내물왕은 보답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제도 고구려 후미를 치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402년 고구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빼앗겼던 신성과 남소성을 회복하고,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404년 11월에 여세를 몰아 후연의 유주로 진격하고, 도성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남쪽의 백제와 연의 연합군의 공격에 후퇴하였고 평주, 신성, 남소성을 모두 잃고 요동성까지 밀리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연합군을 퇴각시켰고, 요동성을 지키며 후연의 군대까지 물리쳤다.
하지만 후연, 백제, 왜를 막아낸 고구려의 국력 소모는 매우 컸다.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乙卯年 을묘년 國崗上 국강상 廣開土地好太王 광개토지호태왕 壺杅 호우(그릇)


407년 2월 광개토대왕은 평양성과 동황성을 증축 수리하고 전쟁에 대비,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래서 백제 6개 성을 함락하고 백제군을 초토화하였고, 백제의 국력은 약화되었다.
그무렵 후연은 북연과 남연으로 갈라졌는데,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연의 왕은 고구려 출신의 고운이었다.
고운은 고구려에 호의를 보였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여 화친을 맺고 변방을 안정시켰다.

변방이 안정되자 409년 장남 거련을 태자로 책봉하고, 평양의 백성들을 동쪽의 독산등 새로쌓은 6개 성으로 이주시켰다.
또, 백제로부터 빼앗은 남쪽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을 위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조공 약속을 받아냈으며, 동부여의 귀족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주변 국가들을 평정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며, 전쟁으로 힘들었던 백성들의 삶을 진작시켰지만 412년 10월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국강상 지역에 마련하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하였다.
약칭으로 영락제 또는 광개토대왕이라 하였다.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20대 태왕인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 아버지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 규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요사건
· 백제 정벌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에 의해 전사한 일을 잊지 않았을것이다.
이에 392년 7월부터 백제를 공격하여 10월 백제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주위가 바다로 둘러쌓인 요새로 백제의 최후 보루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백제는 내분이 일어나 아신왕이 진사왕을 제거하고 새로 왕에 올라 고구려를 공격했다.
393년 8월 아신왕은 외숙부 진무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394년 7월 다시 공격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은 5천의 군사로 수곡성에서 물리쳤다.
395년 8월 다시 백제가 침략하자 광개토대왕은 직접 7천의 군사를 이끌고 패수에서 백제군 8천을 죽였다.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공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396년 봄, 광개토대왕은 대선단을 이끌고 백제로 향하였다.
대선단을 이끈 고구려군은 상륙하여 일팔성을 비롯 50개 성을 함락하고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 영토 확장
광개토대왕은 후연, 백제, 왜, 거란, 동부여등 주변국가들과 많은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를 위협하던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명 호우는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다.

가족관계(광개토대왕 가계도)

· 왕후, 승평
왕후와 차남 승평에 대한 기록은 없다.

· 거련(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장남이자, 고구려 20대 왕. 장수왕편 참고.

광개토대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광개토대왕은 주변국들의 혼란과 침략속에서도 이를 방어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내정을 안정화시켰다.

동시대에 백제는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내물왕, 실성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