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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23대 안원왕(安原王)

by badineri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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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3대 안원왕(安原王)
출생 ? ~ 545년 3월
재위 531년 5월 ~ 545년 3월(13년 10개월)
가족 부인 1명, 자녀 2남

생애
안원왕은 문자명왕의 차남이며, 안장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보연이다.
보연은 키가 7척 5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 또한 존경을 받았다.
안장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531년 5월 고구려 23대 왕에 올랐다.
안원왕 즉위시에는 북위가 내란으로 혼란했고, 그 결과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게 된다.

남쪽의 백제는 538년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540년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우산성은 고구려가 498년 신라로부터 빼앗아 남쪽 전진기지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535년 대홍수와 지진, 536년 가뭄과 메뚜기떼등 많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유랑민이 발생하였다.
안원왕은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을 순행하고, 양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기를 이용해 백제 성왕은 우산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수세에 몰려 우산성이 포위되었으나, 안원왕은 정예기병 5천을 우산성으로 급히 보내 가까스로 성을 지켜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는 백제에 대항하지 못했다.
계속된 자연재해와 우박등 이상기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원왕은 재위기간내내 자연재해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했고,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544년 12월 아들들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장남 녹군(평성-양원왕)과 차남 세군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져 세군이 죽고, 세군가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속에서 안원왕은 3달후인 545년 3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묘호는 안원왕(安原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안원왕 기록

 

주요사건
· 아들들의 왕위 다툼 사건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544년 12월, 안원왕의 장남 녹군(평성)과 차남 세군이 왕위를 다투다가 세군과 가족들이 죽음을 맞았다.
그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000명이 넘었다.
일본서기를 보면 안원왕의 왕후는 아들이 없었고, 두 소왕후를 들였는데 각각 아들을 낳은것이 녹군과 세군이었다.
그래서 녹군세력과 세군세력이 왕위 계승을 놓고 형제의 난이 벌어진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삼국사기등 한반도 자료에는 보이지 않아 분명하지는 않다.

가족관계(안원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두 아들이 있지만 왕후의 소생인지 일본서기에 의해 다른 왕후들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 평성
안원왕의 장남이자 24대 양원왕. 양원왕편 참고.

· 세군
형인 평성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 가족들과 함께 죽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안원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안원왕 재위시에는 자연재해가 계속 발생해 백성들과 나라 경제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토확장보다 방어에만 주력했고, 말기에는 아들들의 왕권다툼까지 일어났다.

동시대에 백제는 성왕,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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