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
출생 ? ~ 559년 3월
재위 545년 3월 ~ 559년 3월(14년)
가족 부인 1명, 자녀 1남
생애
양원왕은 안원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평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호방했다고 한다.
533년(안원왕 3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545년 3월 안원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24대 왕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를때 동생 세군과의 왕위 쟁탈전이 있었다.
결국 3일만에 양원왕이 진압하고, 동생 세군과 그의 가족을 참하였다.
때문에 고구려 조정이 흔들리고 양원왕의 위상도 약화되게 되었다.
국제정세도 북쪽에 동위와 서위세력이 약화되자, 돌궐이 위협을 가하였고 물길과 말갈도 국경을 위협하였다.
남쪽에는 진흥왕의 신라 세력이 확대되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 양원왕은 547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한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군사 6천을 동원하여 아리수 북쪽의 백제 독산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신라 장군 주령이 3천을 이끌고 백제군에 가세하는 바람에 퇴각하고 만다.
반면 중국쪽에서는 양나라와 동위가 내분으로 혼란했는데, 고구려는 이에 신경을 쓸수밖에 없었다.
그런 틈을 노려 550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다.
이에 고구려는 보복으로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은 피로에 지쳐갔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신라는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와 백제군을 내쫒고 두 성을 차지하였다.
이 사건으로 백제, 신라의 동맹을 깨지게 되고 삼국관계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신라가 강성해지고 있을때, 고구려 북쪽에서 돌궐이 세력을 키워 551년 고구려를 침입했다.
그해 9월 돌궐이 고구려 신성을 포위했는데, 장군 고흘이 1만의 군사로 돌궐 1천의 군사를 죽이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이용한 신라 진흥왕은 거칠부를 수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돌궐과의 싸움으로 전력이 약해진 고구려는 신라의 침입을 막지못해 무려 10개의 성을 빼앗긴다.
상황이 불리해진 고구려 양원왕은 552년 새로운 도읍지로 장안성을 축조한다.
백제와 신라도 전쟁을 벌였는데, 백제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예전같지 않았다.
그래서 성왕은 왜나라에 왕자 창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이기회에 백제를 공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북쪽에서 거란 백성 1만호가 귀순하는 바람에 백제 공격을 미뤄야 했다.
백제와 신라는 갈수록 관계가 악화되고, 554년 7월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다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고구려는 10월 백제 옹천을 공격했지만, 백제 위덕왕(왕자 창)의 군사에 밀려 퇴각하였다.
이후 양원왕은 더 이상 백제를 공격하지 못했다.
한편 중국에세도 북쪽에는 북주와 북제, 남쪽에는 진나라가 들어서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속에 고구려에서도 모반사건이 발생한다.
557년 10월 환도성의 장수 간주리가 군대를 일으킨것이다.
하지만, 관군에 의해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간주리는 생포되어 처형되고 더이상 반란이 확산되지는 않았다.
양원왕은 이런 고난과 혼란속에서 559년 3월,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양강상 지역에 마련되었고, 묘호는 양원왕(陽原王)이라고 하였다.
주요사건
· 백제 성왕 전사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우고 지치기만을 기다려 어부지리로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제동맹이 깨지고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적대국이 되자, 백제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보낸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좋아지지 못했고, 백제는 왜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고 554년 5월 왜의 전함 40척이 백제로 향한다.
왜군이 도착하고 554년 7월, 성왕은 신라의 전쟁을 시작하였고, 첫 공격목표는 관산성이었다.
하지만, 신라군에 있던 가야세력 김무력이 백제 태자 창의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성왕은 호위병 50명을 이끌고 밤에 전선으로 가지만,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노비출신 장수 도도에 의해 참수당하였고, 성왕의 시신은 서라벌로 보내진다.
성왕의 머리는 신라 도당의 계단밑에 묻고, 나머지는 백제에 보내진다.
가족관계(양원왕 가계도)
· 왕후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양성
양원왕의 장남이자 25대 평원왕. 평원왕편 참고.
양원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양원왕은 북쪽의 돌궐, 물길, 말갈세력과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부터 항상 위협에 쌓여있었고, 내부적으로 모반사건까지 일어나는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동시대에 백제는 성왕, 위덕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진흥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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