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출생 ? ~ 737년 2월
재위 702년 7월 ~ 737년 2월(34년 7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4남1녀
생애
성덕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본디 이름이 융기(隆基)였으나, 당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아 선천(先天) 연간 이름을 고쳤다.
당서에는 김지성(金志誠)으로 되어있다.
효소왕이 후사 없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해 702년 7월, 신라 33대 왕에 올랐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효소왕을 위해 애도식을 거행하고 2일 동안 조정을 폐했다.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했으며,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형의 장군과 도독의 작호를 그대로 물려받게 했다.
702년(재위 원년) 9월,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의 관작을 한 자급씩 올려주고 여러 주군에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고, 10월에는 삽량주(歃良州) 상수리나무 열매가 변해 밤이 되었다.
703년(재위 2년) 정월, 신궁에 몸소 제사를 지내고, 사신을 파견해 당에 보내 조공했다.
7월, 영묘사(靈廟寺)에 화재가 났고, 도읍에 홍수가 나서 익사한 사람이 많았다.
중시 원훈이 물러나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일본국에서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케 했다.
704년(재위 3년) 정월, 웅천주에서 금색 영지(靈芝)를 진상했다.
당으로 갔던 김사양이 신라로 돌아와 최승명경(最勝王經)을 왕에게 올렸다.
5월, 승부령(乘府令)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705년(재위 4년), 중시 원문이 죽어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5월, 가뭄이 들고, 8월에 노인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9월, 교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했다.
10월, 나라 동쪽 주군에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유랑하여 사신을 보내 진휼했다.
706년(재위 5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 안에 기근으로 창고를 열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했고, 3월에는 많은 별들이 서쪽으로 흘렀다.
8월, 중시 신정이 병이 들어 사직하자 대아찬 문량(文良)을 중시로 삼았고,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12월, 대사면령을 내렸다.
707년(재위 6년) 정월, 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 1인당 하루 3승의 벼를 7월까지 배급해 주었다.
2월, 대사면,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708년 정월, 사벌주(沙伐州)에서 상서로운 영지버섯을 진상했다.
2월, 지진이 났고, 4월에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범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709년(재위 8년) 3월, 청주(菁州)에서 흰매를 진상했다.
5월에 가뭄, 8월에는 사면령을 내렸다.
710년 정월, 천구(天狗, 유성 또는 혜성)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고, 지진으로 사면령을 내렸다.
711년 3월, 큰 눈이 내렸고, 5월에는 가축의 살생을 금했다.
10월, 국가 남쪽 주군을 순수했고, 중시 문량이 죽었다.
11월,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들이 보게 했다.
712년(재위 11년)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파견해 칙서를 내려 왕의 이름을 고치게 했다.
4월, 어가가 온수(温水)에 행차했고, 8월에는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석을 하사했다.
713년(재위 12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고, 당 현종이 누문(樓門)으로 거동하여 우리 사신들을 접견했다.
10월, 당에 사신으로 갔었던 김정종(金貞宗)이 돌아와 당 황제의 내린 조서를 전했다.
왕을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 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 사지절(使指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봉했다.
11월, 중시 위문이 노환으로 사직을 청하자 그에 따랐고, 12월에는 대사면, 개성(開城) 축조했다.
714년(재위 13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고, 2월에는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치고 표문 쓰는 일을 관장하게 했다.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으로 보내 황제를 숙위케 했다.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하사하고 그를 총애하며 조당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윤 2월, 급찬 박유(朴裕)를 당으로 보내 신년 하례했다.
당나라에서 그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여름, 가물어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이 걸렸다.
가을, 삽랑주에서 산의 상수리나무 열매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10월, 당 현종이 우리 사신에게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칙령을 내려 재상과 4품 이상 청관(淸官)에게 연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715년(재위 14년) 3월, 김풍후(金楓厚)를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4월에는 청주에서 흰 참새를 진상했다.
5월에는 사면령을 내렸고, 6월에는 큰 가뭄으로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에 사는 거사(居士) 이효(理曉)에게 불러서 임천사(林泉寺) 연못 위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즉시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9월, 태백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고, 10월에는 유성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했다.
12월 유성이 천창(天倉)에서 태미(太微)로 들어갔다.
사면령을 내리고,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삼아 책봉했다.
716년(재위 15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하고 달에 빛이 없었다.
3월, 성정왕후(成貞王后) 또는 엄정(嚴貞)를 내보내고 채색 비단 5백 필, 논밭 2백 결, 벼 1만 석, 집 한 채를 하사했다.
집은 강신공(康信公)의 옛집을 사서 하사한 것이다.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당나라에 신년 하례 사신으로 갔던 김풍후가 귀국하고자 하자, 원외랑(員外郞)의 벼슬을 주어 그를 돌려보냈다.
6월, 가물어 또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즉시 비가 내렸으며 사면령을 내렸다.
717년(재위 16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算博士) 각각 1명을 두었다.
3월, 신궁(新宮, 궁궐이 아닌 관아의 명칭)을 세웠고, 4월에는 지진이 났다.
6월, 태자 중경(重慶)이 죽었다. 시호는 효상(孝殤)이다.
9월, 당나라에 갔던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돌아왔다.
718년(재위 17년) 정월, 중시 효정이 퇴직하여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왕이 나라 서쪽 주군을 순행하고 위무했으며 친히 나이가 많은 백성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자들을 방문하고 차등 있게 재물을 하사했다.
3월, 지진이 났고, 6월에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으며,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당나라에 조공하고, 조공 사신에게 수중랑장(守中郞將)을 제수하고 사신을 돌려보냈다.
10월, 유성이 묘성(昴星)의 자리에서 규성(奎星)로 들어갔고 작은 무리의 별들이 그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천구성(天狗星)이 간방(艮方)의 자리로 떨어졌고, 한산주 도독이 관할 구역 내에 여러 성을 축조했다.
719년(재위 18년) 정월, 당으로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했고, 9월 금마군(金馬郡)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쳤다.
720년 정월, 지진이 났고, 상대등 인품(仁品)이 죽자 대아찬 배부(裴賦)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이찬 순원의 딸을 왕비로 삼아 맞이했다.
4월, 많은 비가 내려 산 13곳이 붕괴되고 우박으로 벼의 모종을 상하게 했다.
5월, 해당 관청에 명해 해골을 매장하게 했다.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했다.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했다.
7월 웅천주에서 흰 까지를 진상했다. 황충이 일어 곡식을 해쳤다.
중시 사공이 퇴직하여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1년(재위 20년) 7월, 하슬라도(何瑟羅道) 장정 2천을 징발하여 북쪽 변경에 장성(長城)을 축조했고,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어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 도읍에 지진이 났고, 8월에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10월, 대내마 김인일(金仁壹)을 당으로 보내 신년 하례하고 조공했다.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축조해 일본 도적들이 침입하는 길을 차단(遮斷)했다.
723년(재위 22년) 3월, 당에 미녀 2명을 바쳤다.
한 명은 포정(抱貞)으로 부친은 내마 천승(天勝)이고 한 명은 정완(貞菀)으로 대사 충훈(忠訓)이다.
그들에게 의복, 그릇, 노비, 수레, 말을 지급해 주고 재물들을 예를 갖추어 보냈다.
당 현종이 말하길 "미녀들 모두 신라왕 고모의 딸들로 피붙이와 떨어지고 고향과 이별하여 왔으니 짐은 차마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후한 재물을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정완의 비석에 따르면 효성왕 6년(742년) 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했다고 하는데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4월, 당에 과하마(果下馬, 조랑말) 1필, 우황(牛黃, 약재의 하나), 인삼, 미체(美髢, 여자들 머리장식), 조하주(朝霞紬, 비단의 한 종류), 어아주(魚牙紬, 명주의 한 종류), 매를 새긴 방울, 바다표범의 가죽, 금, 은 등을 조공하며 표문을 올려 말하길
"신의 고향은 바다 구석진 곳에 있어 땅은 당의 도읍지에서 먼 곳에 있어 원래 천객(泉客)의 보물도 없고 본디 종인(賨人, 외국)의 재물도 본디 부족합니다.
감히 장차 조공물이 황제의 관아를 티끌만큼이라도 더럽히고 재주가 노둔한 말로 천자의 마구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연(燕)나라에서 바친 돼지 같고 감히 초(楚)나라 닭과 비슷합니다.
마음속 깊이 깨우쳐 낯부끄러워 더욱더 땀이 납니다."
724년(재위 23년) 봄 왕자 승경(承慶)을 태자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렸고,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영지를 진상했다.
2월, 김무훈(金武勳)을 보내 신년 하례했다.
무훈이 돌아와서 당 현종의 조서를 내려 말하길 "경은 매년 당의 책력을 받들고 우리 조정에 조공을 하니 그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생각해 보고 말하건대 매우 가상하다고 여긴다.
또한, 여러 진상품들을 받아보니 모두 창대한 파도를 넘고 풀이 우거진 곳을 건너왔는데 진상품이 정교하고 수려하여 경의 마음을 깊이 드러내 보였다.
지금 경에게 비단 도포와 금으로 만든 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 모두 2천 필을 하사하여 보내온 정성스러운 조공품에 답하는 것이니 물품이 도착하면 마땅히 수령하도록 하라."
12월,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725년(재위 24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고, 3월에 눈이 왔다.
4월에는 우박이 떨어졌고, 중시 선종이 퇴직하고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10월, 지진이 났다.
726년(재위 25년) 4월, 김충신(金忠臣)을 당해 보내 신년 하례했다.
5월, 왕의 동생 김근질(金釿質)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 낭장(郎將)에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727년 정월, 사면령을 내렸다.
4월, 일길찬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12월,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했고, 상대등 배부(裴賦)가 노환으로 퇴직을 청했는데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728년(재위 27년) 7월, 왕의 동생 김사종(金嗣宗)을 보내 당 조공 아울러 표문을 올려 자제들을 국학(國學)에 입학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그 청을 허락했다.
사종을 과의(果毅)에 제수하고 그대로 머물러 황제를 숙위해 했다.
상대등 배부가 다시 노환으로 퇴직하길 청하자 그에 따랐다.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29년(재위 28년) 정월, 당나라에 신년 하례를 했다.
730년 2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작은 말 5 필, 개 1마리, 금 2천 냥, 두발 8천 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당 현종이 지만을 태복경(太僕卿)에 제수하고 비단 1백 필, 자주색 도포, 세공(細工)된 비단 띠를 하사하며 그대로 머물러 자신을 숙위해 했다.
10월, 당나라 현종이 차등 있게 재물을 하사했다.
731년(재위 30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에 보내 신년 하례했다.
당 현종이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에 제수하고 비단 6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냈으며 조서를 내려 말하길
"진상한 우황과 금은 등의 물품은 표문과 함께 살폈다.
그대 부부의 경사스러운 복으로 삼한이 이웃과 사이가 좋고 이때를 이곳을 어질고 도리가 있는 땅이라 칭하니 대대로 공적과 어진 업적을 이루었으며 문장과 예악에서는 군자의 위풍을 드러냈다.
정성을 바치고 충성을 다하며 부지런히 왕의 절개를 드러내어 굳건하게 번방을 지키고 유지하며 진실로 충의로운 몸가짐의 표본이라 할만한데 어찌 다른 나라의 사나운 풍속과 같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도리를 사모하기를 매우 부지런하였고 조공의 직분을 행함에 더욱 근면했다.
험한 산을 넘고 바다 건너 길이 막히고 멀다 하여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진귀한 물품을 조공으로 바치며 세월이 지나도 꾸준하게 계속 행하였다.
우리의 법도를 지키고 여러 국가에 모범이 되고 더구나 간절한 정성을 돌아보니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짐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를 돌보는데 힘쓰며 현명한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본다면 서로 속마음을 비추어 이야기하려고 생각하였고 경을 만나기를 기다려 진실로 마음에 품은 바를 나누고자 했으나 지금 사신이 이르러 병에 걸려 고생하여 끝내는 조정에 나오라는 명을 받들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 곳에 생각하니 걱정이 더하게 된다.
기후가 온난해지면 병이 나아 회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경에게 무늬 비단 500필과 비단 2,500필을 하사하니 마땅히 바로 수령토록 하라."
4월, 사면령을 내렸고, 나이 많은 백성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동쪽 변경을 습격하여 왕이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출병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 백관에게 명해 적문(的門)에 모이게 하여 차노(車弩)를 발사하는 것을 관람했다.
732년(재위 31년)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允忠),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733년(재위 32년) 7월, 당 현종이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보냈다.
이에 왕의 관작을 더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제수하고 군사를 징발해 말갈 남쪽 변방을 공격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큰 눈이 한 장(丈) 남짓 내려 산길이 막혀 군사와 병사들 과반수가 죽었으며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디 왕족으로 이전에 당에 입조할 때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당에 머물러 황제를 숙위하였고, 이때에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12월, 왕의 조카 지렴(志廉)을 당에 보내 조회하게 하고 은혜에 사례했다.
이전에 당 황제가 왕에게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씩과 자줏빛으로 수놓은 도포, 금은으로 세공된 그릇, 상서로운 무늬가 새겨진 비단, 오색이 둘러진 채색 비단 모두 3백여 단을 하사했다.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며 말하길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개원(開元)이래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를 다하시어 성스러운 문덕(文德)과 신비한 무용(武勇)이 천 년의 창성할 운수에 응하며 만물이 아름답고 상서로움에 이르렀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곳 모두 (황제의) 지극한 덕을 받고 해와 달이 미추는 곳 모두 두터운 자애로움을 입었습니다.
소신의 땅은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壺=方丈山)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천자의 자애로움은 멀리까지도 널리 미치어 신이 있는 곳에서 황제의 나라를 바라보았더니 황제의 은혜가 구석진 곳에 미쳤습니다.
엎드려 황제의 경문(瓊文)을 읽고 무릎을 꿇어 옥이 장식된 상자를 풀어보니 높은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고 오색의 봉황과 난새가 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는 봉황은 희고 푸른데 둘 다 오묘(奧妙)한 것으로 혹은 장안(長安)의 노래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성스러운 황제 폐하의 은혜라고도 전합니다.
비단의 채색 무늬와 금·은 보물의 세공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들은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은 실로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이와 같이 비상한 은총(恩寵)을 내려주셔서 멀리 후손들에게도 연이어 미쳤습니다.
선대를 본받아 행한 것이 티끌과 같이 미세(微細)한데 황제의 두터운 은혜는 큰 산과 같습니다.
저의 처지를 따르고 분수를 헤아려 어찌 황제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조서를 내려 지렴에게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하고 비단을 하사했다.
734년(재위 33년) 정월, 교서를 내려 백관들이 직접 북문으로 들어오도록 하여 왕의 물음에 신하들이 대답하도록 했다.
당으로 가서 숙위에 임하고 있는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표문을 올려 말하길
"신이 받은 명령은 신으로 하여금 황제의 부절(符節)을 지니고 본국에서 병마를 징발하여 말갈을 토벌하고 제거하여 일이 있을 때 계속해서 황제께 아뢰는 것입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은 후부터 장차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때 당시 저를 대신하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어서 신은 다시 머물러서 숙위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은 신이 오랫동안 천자의 조정을 모셨기 때문에 사신으로 왕의 조카 지렴을 파견해 신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지금 이미 지렴이 도착하였으니 신은 즉시 돌아가는 것이 적합(適合)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받들은 황제의 명을 매일 생각하며 밤낮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분부하시어 저의 본국의 왕 흥광(興光, 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정절(旌節)을 하사하시면서 흉악한 적을 토벌하게 하셨습니다.
황제의 위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면 비록 멀다 하여도 가까운 것 같고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신하가 감히 그 명령을 공손하게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지하고 하찮은 오랑캐들은 이미 과오를 뉘우쳤을 것으로 짐작되나 악을 제거하고 근본에 힘써 헌법을 공포하며 새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군사를 내는 도리는 세 번의 승전보다 귀하고 적을 내버려 두면 여러 세대에 걸쳐 우환을 끼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 부사(副使) 직책을 임시로 신에게 주셔서 장차 천자의 뜻을 다하여 거듭 다른 변방에 널리 선포하게 해주시옵소서.
어찌 오직 이러한 것이 황제의 위세를 더욱 떨치는 것뿐이겠습니까?
틀림없이 또한 무인들의 사기를 진작하여 반드시 적의 소굴을 순종(順從)시키고 이 황량한 변방의 구석진 곳을 안정(安靜)시킬 것입니다.
마침내 동이(東夷, 신라) 신하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신들은 다시 창대한 바다에 배를 띄워 승전보를 천자의 대궐에 바칠 것입니다.
아주 작은 공이라도 바쳐 베푸신 은혜(恩惠)에 보답하는 것이 신의 소망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이를 헤아려 주십시오." 황제가 허락했다.
4월,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에 보내 신년하례. 황제가 내전에서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제수하고 비단 난포(襴袍)와 평평하게 펴진 은색 띠 및 비단 60 필을 하사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지렴을 보내 은혜에 사례하며 작은 말 2필, 개 3마리, 금 500냥, 은 20냥, 베 60필, 우황 20냥, 인삼 200근, 두발 100냥,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진상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지렴을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에 제수했다.
735년(재위 34년) 정월, 형혹성이 달을 범했고,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하례를 했다.
2월, 당에 머물던 김영(金榮)이 죽어 광록소경(光祿少卿)에 추증했다.
의충이 돌아와 황제의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하사했다.
736년(재위 35년) 6월, 당에 보내 신년하례 거듭하여 표문을 덧붙여 사례하며 말하길
"패강 이남의 땅을 하사한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엎드려 받들었습니다.
신은 바다 구석진 변방에 살면서 천자의 성스러운 조정에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가슴에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있으나 가히 드러낸 공적도 없고 충정으로 (천자의 조정을) 섬겼으나 상을 받기에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폐하께서 은혜를 내리시고 해와 달을 밝히는 조서를 내리시어 신에게 강토를 하사해 주셨습니다.
신의 백성들이 살아갈 고을을 넓혀주시고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도록 기약할 수 있게 하였고 농사짓고 누에 칠 수 있는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은 황제께서 내린 조칙의 뜻을 받들어 영화로운 은총을 깊게 입어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더라도 황제 폐하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11월, 왕의 사촌 동생 대아찬 김상(金相)을 보내 당에 입조하게 하였으나, 가는 길에 죽어 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위위경(衛尉卿)에 추증했다.
이찬 윤충,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과 우두 두 주의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개가 재성(在城, 월성) 북을 두드리는 누각에 올라 3일 동안 짖었다.
737년(재위 36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에 보내 신년하례와 당나라에 조공했다.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성덕(聖德)이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서 장사지냈다.
가족관계(성덕왕 가계도)
· 성정왕후 김씨
소판 김원태의 딸이며 배소부인에서 엄정왕후라고 불렀다.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시집와서 성덕왕 3년(704년) 5월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성덕왕 15년(716년) 3월에 두번재 왕후인 소덕왕후때문에 출궁당했다.
그후 724년에 소덕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궁으로 들어왔다.
· 중경
성덕왕의 장남. 태자에 올랐으나, 717년 6월에 사망했다. 시호를 효상이라고 하였다.
· 수충
성덕왕의 차남. 714년에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717년 형인 중경태자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대감의 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 성정왕후가 출궁당한 상태였기때문에 그는 태자의 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 소덕왕후 김씨
이찬 김순원의 딸.
점물부인으로 불리다가 720년에 왕후로 책봉되었다.
왕후가 된지 4년만에 아들인 승경이 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사망한다.
· 승경
신라 34대 효성왕편 참고.
· 헌영
신라 35대 경덕왕편 참고.
· 사소부인
성덕왕의 딸. 개성대왕 효방에게 시집갔다.
그녀의 아들은 36대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김양상(선덕왕)이다.
선덕왕 즉위후 정의태후에 추존되었다.
주요사건
· 성덕왕의 차남 수충의 귀국
717년(재위 16년) 9월, 당나라에 갔던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시호), 십철(十哲, 공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 72제자(공자의 뛰어난 72명의 제자)의 그림을 왕에게 올리니 즉시 대학(大學)에 안치했다.
· 당나라, 일본, 발해와의 관계
성덕왕 재위 20년경부터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722년 10월, 일본의 침입을 염려해 모벌군성을 쌓아 침입로를 막았다.
731년에 일본은 함대 3백척에 군대를 나눠 싣고 신라로 왔다.
그러나 이미 신라는 침입로를 철저히 수비하고 결국 일본국은 크게 패배하여 쫒겨갔다.
733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동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 현종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요청을 받아들이고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해 돌아와야했다.
성덕왕은 이 상황을 당나라에 알리고, 참전이 어렵다고 했다.
아마도 성덕왕은 발해와 외교적 마찰을 원치 않았던것 같다.
어쨌든 성덕왕은 734년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이 신라 땅임을 확정하는 조칙을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성덕왕 재위당시 통일신라 연표
성덕왕은 정치와 외교적으로는 안정세를 행했으나, 천재지변은 피해가지 못했다.
홍수와 지진, 가뭄으로 백성들의 삶은 곤궁했고, 유랑민이 많아 국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했다.
신라 왕 계보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탈해 이사금-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일성 이사금-아달라 이사금-벌휴 이사금-내해 이사금-조분 이사금-첨해 이사금-미추 이사금-유례 이사금-기림 이사금-흘해 이사금-내물 이사금-실성 이사금-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 마립간-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선덕왕-원성왕-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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