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5대 경종(景宗)
출생 955년 11월 14일 ~ 981년 8월 18일
재위 975년 7월 9일 ~ 981년 8월 18일(6년 1개월)
가족 부인 5명, 자녀 1남
생애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景宗)은 본명은 왕주(王伷)이며,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광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 뒤를 이어, 개혁의 부작용을 수습하고 전시과 제도를 최초로 마련한 임금입니다.
아버지 광종의 피비린내 나는 호족 숙청 작업 속에서 자라나 늘 생명의 위협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975년 즉위한 직후, 광종 때 억압받았던 호족과 공신 세력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온건한 정치를 표방했다.
975년 즉위후 광종 시대에 억울하게 처벌받았던 사람들을 대거 사면하고 유배된 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집정 왕선(王詵)의 건의로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복수법이 시행되었다.
976년 복수법의 폐단으로 태조의 아들(천안부원군 등)이 살해되는 등 혼란이 극심해지자, 경종은 복수법을 폐지하고 주모자 왕선을 귀양 보냈다.
11월 고려의 근간이 되는 토지 제도인 시정 전시과(始定田柴科)를 처음으로 제정하여 관리들에게 품계와 인품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977년~979년 국교 강화와 내부 정비를 하였다.
977년 중국 송나라와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979년 발해의 세자가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해 오자,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섭하였다.
980년 최지몽(崔知夢)이 별의 움직임을 보고 왕승(王承) 등의 모반을 예견했다.
경종은 이를 미리 파악하여 왕승 일파를 처형함으로써 반란을 제압했다.
981년 경종의 병세가 위독해졌는데, 아들(훗날의 목종)이 너무 어리다고 판단하여 사촌 동생인 개령군 왕치(훗날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8월 장화전(長和殿)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족관계(경종 가계도)

● 헌숙왕후 김씨
고모 낙랑공주와 경순왕 김부의 딸로서 경종과는 고종사촌 지간이다.
● 헌의왕후 류씨
숙부인 문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의 딸로서 경종과는 친사촌 겸 고종사촌이다.
● 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
헌정왕후와 같이 외삼촌이자 숙부인 대종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들로 경종과는 친사촌 겸 외사촌 겸 고종사촌 지간이다.
헌애왕후보다는 천추태후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하며,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은 여인이다.
목종은 성종 이후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보위를 이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시해당하면서 경종의 후사는 끊기게 된다.
· 목종(6대왕)
● 헌정왕후 황보씨
앞에 나온 헌애왕후의 여동생으로 마찬가지로 친사촌 겸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
경종 재위 시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경종이 승하한 이후 숙부인 왕욱과 사통하여, 사생아를 낳았다.
남편인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인지 자매지간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남자 문제로 여러 가지 물의를 빚었다.
● 대명궁부인 류씨
숙부 원장태자와 친고모 흥방궁주의 딸로 친사촌 겸 고종사촌이다
주요사건과 인물
● 복수법(復讐法) 파동(975년~976년)
광종의 공포정치 시기 억울하게 숙청당한 호족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조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시행된 법이었으나, 사리사욕과 권력투쟁으로 변질되며 큰 혼란을 낳았다.
왕선은 경종 즉위 직후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관직인 집정(執政)에 오른 인물인데, 광종에게 탄압받았던 호족 세력을 대변했다.
왕선은 경종에게 "선대에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의 원한을 갚게 해달라"고 건의하여 사적 보복을 허용하는 복수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광종의 친위 세력을 무차별 도륙하는 피의 보복극으로 변질되었다.
권력에 도취된 왕선이 복수법을 핑계로 왕의 친척인 종실(천안부원낭군, 진주낭군)까지 독단적으로 살해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을 받은 경종은 976년 11월 복수법을 전격 폐지하고 왕선을 외방으로 유배 보냈다.
경종은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기존의 단일 '집정' 체제를 좌집정(순질)과 우집정(신질)의 공동 관리 체제로 개편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 시정 전시과(始定 田柴科)의 제정(976년 11월)
복수법 파동으로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호족들을 중앙 관료 체제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단행한 고려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제 개혁.
976년 11월, 국가의 토지 제도인 시정 전시과를 최초로 마련했다.
태조 때 논공행상으로 주던 '역분전'을 폐지하고, 국가 관직 체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근대적 관료제의 기틀을 닦았다.
관리의 계급(자·단·비·녹의 4색 공복)과 개인의 성품 및 행실(인품)을 함께 고려하여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전지(田地)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柴地)의 수조권(세금을 거둘 권리)을 차등 지급했다.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군림하던 호족들이 국가에 관직을 봉사해야만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호족을 완전히 중앙 관료(신하)로 복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발해 세자 대광현 계열의 망명 수용(979년)
926년 발해 멸망 후, 979년, 수천 명의 발해 유민이 고려로 대규모 망명을 해오자 경종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관직과 토지를 하사했다.
이는 고려가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공식적으로 이어받았음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내부 인력을 보강한 중요한 외교·민족적 사건이다.
● 왕승(王承)의 모반 사건과 최지몽의 활약(980년)
태조부터 성종까지 6명의 왕을 보좌한 고려 초기의 천재 책사이자 천문·해몽 전문가.
광종 시기 말년에 유배되어 있다가 경종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복귀했다.
980년, 최지몽이 밤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천문 점성술)을 관측한 후 경종에게 "조정에 역모의 기운이 있으니 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종은 사전에 군사를 움직여 반역을 도모하던 왕승 일파를 일망타진하고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최지몽은 경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 양위(讓位) 결정과 성종의 즉위(981년 7월)
경종의 마지막 결단이자 후대 성종 시기 유교 정치의 꽃을 피우게 만든 결정적 사건.
개령군 왕치(훗날의 성종)는 대종 왕욱의 아들이자 경종의 사촌 동생이다.
981년 7월, 주색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경종은 임종을 앞두고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친아들(왕송, 훗날의 목종)이 겨우 2세의 갓난아기였기에, 왕실의 안정을 위해 사촌 동생인 왕치에게 왕위를 선양(양위)하였다.
경종 재위당시 연표

고려 왕 계보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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