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7대 목종(穆宗)
출생 980년 7월 10일 ~ 1009년 3월 8일
재위 997년 12월 4일 ~ 1009년 3월 8일(11년 4개월)
가족 부인 2명, 자녀 없음.
생애
고려 제7대왕 목종(穆宗)의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 능호는 의릉(義陵), 휘는 송(誦), 자는 효신(孝伸)이다.
경종(제5대)과 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의 아들로 왕자 시절의 봉호는 '개령군'(開寧君)이었다.
화려한 왕실 핏줄을 타고났으나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그늘에 가려지고, 결국 신하의 쿠데타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군주이다.
고려 초기 왕실 내의 극단적인 족내혼 풍습으로 인해 목종은 모든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비이다.
또한 증조모들은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부인 선정왕후도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친손자 홍덕원군이며 어머니는 광종(제4대)의 딸 문덕왕후이니 그야말로 엄청난 가계도인 셈이다.
목종 이전이나 이후로도 이런 핏줄을 가진 왕은 탄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막강한 정통성을 가진 목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왕조 최초로 폐위되어 최초로 유배에 처해져 최초로 시해된 왕이었다.
997년 12월 성종의 승하로 18세의 목종이 즉위하고, 친모인 헌애왕후(천추태후)를 왕태후로 높이며 섭정을 시작했다.
대포(大赦)령 및 외교 조치즉위 기념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승려의 품계를 올렸다.
거란(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알렸다.
998년 2월 목종의 명으로 주인걸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합격시키며 문치 주의를 이어갔다.
8월 북진 정책의 상징인 서경의 관제를 태조 시기 수준으로 복구하고 위상을 크게 높였다.
998년 관료와 군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던 '시정전시과'를 전면 개편했다.
주관적인 '인품' 기준을 삭제하고 관직(관품)만을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하는 합리적 경제 제도를 확립했다.
999년 11월 동여진의 추장 아로라 등이 고려의 위세에 복종하여 개경으로 찾아와 토산물을 바치고 귀순했다.
1000년 10월 사학 및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박사, 의사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교육 기반을 넓혔다.
1002년 여진과 거란의 잠재적 침공에 대비해 안변(함남), 귀성(평북), 정평(함남) 등에 대규모 성을 새로 쌓아 국경 방어선을 확정했다.
1003년 10월 개경, 서경, 동경 및 전국 10도의 우수한 학생들을 중앙 관리로 발탁하는 천거제를 실시해 지방 세력을 포섭했다.
1004년 3월 시험 절차를 3일간 치르게 하고, 채점과 합격자 발표를 1주일 내로 끝내도록 법제화하여 시험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1005년 ~ 1007년 김치양의 권력 장악과 대량원군 박해천추태후의 신임을 등에 업은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우복야 상서에 오르며 조정 권력을 독점했다.
목종이 후사가 없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이 낳은 사생아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훗날의 현종)을 강제로 출가시켜 사찰로 쫓아냈다.
1008년 어머니의 전횡에 무력감을 느낀 목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미남 관리 유행간(劉行簡)을 총애하며 남색에 빠져들었다.
유행간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조정은 김치양 파와 유행간 파로 갈라져 극도로 혼란해졌다.
1009년 1월 목종이 머물던 궁궐의 기름 창고에서 의문의 불이 나 천추전이 전소되었다.
이 충격으로 목종은 심각한 병석에 누웠다.
2월 김치양이 사찰에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독살하려 하자, 목종은 침상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정비해 대량원군을 개경 궁궐로 무사히 호송하고 후계자로 공식 임명했다.
2월 "국왕이 위독하며 김치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보를 받은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가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수도 개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1009년 3월 대궐을 장악한 강조는 김치양 일파와 유행간을 처형했다.
이어 목종의 무능과 실정을 명분 삼아 목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제8대 현종으로 즉위시켰다.
3월 폐위된 목종은 유배지인 충주로 향하던 도중, 강조가 보낸 자객 안패 등에 의해 적성현(파주)교하 부근에서 서른 살의 나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가족관계(목종 가계도)

● 선정왕후 유씨
선정왕후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손자인 홍덕원군 왕규이며, 어머니는 광종의 딸인 문덕왕후.
두 사람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고려 초기 왕실의 동성혼 규제를 피하기 위해, 친할머니(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성씨인 충주 유씨를 따랐다.
친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어머니 문덕왕후가 제6대 국왕 성종과 재혼했고, 이로 인해 선정왕후는 성종의 의붓딸(양딸)이 되어 궁궐에서 자랐다.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목종이 폐위된 후 함께 궁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냈다.
● 요석택 궁인(邀石宅 宮人) 김씨
본래 신분이 낮은 궁녀(내관)였으나, 목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비의 반열에 올랐다.
목종은 그녀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여 '요석택'이라는 별도의 궁택(집)을 하사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요석택 궁인'이라 불렀다.
목종이 폐위되고 시해당하면서, 그녀 역시 작위를 박탈당하고 궁 밖으로 쫓겨났다.
주요사건과 인물
●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 공포(998년)
기존에는 관직의 높고 낮은 구조 외에도 개인의 '인품(도덕성이나 공로)'이라는 주관적인 기준을 섞어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목종은 이 인품 기준을 완전히 삭제했다.
철저하게 현재 맡고 있는 관직의 등급(18품)만을 기준으로 토지(전지)와 땔감을 얻는 산림(시지)의 수조권을 차등 지급했다.
주관적 요소를 빼고 철저한 관료제적 기준으로 전환함으로써 고려의 관료 체제와 국가 재정의 기틀을 완성한 법령으로 평가받는다.
● 동여진 추장의 귀순(999년 11월)
동여진의 유력 부족 추장이었던 아로라를 비롯한 여진인들이 고려의 지배력을 인정하고 스스로 개경(수도)을 찾아와 목종에게 대대적으로 귀순 의사를 밝혔다.
목종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고려의 관직(향직)과 관복, 그리고 풍성한 하사품을 주어 격려했다.
고려는 군사력을 크게 쓰지 않고도 동북방 여진족 부족들을 포섭하여 국경 지대의 안전을 확보했다.
● 과거시행법 개혁(1004년 3월)
고려는 제4대 광종 때 과거제를 처음 도입한 이후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선발해 왔다.
그러나 시험 관리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채점 기간이 너무 길어지거나, 시험 과정에서 부정행위와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목종은 시험 기간의 엄격한 제한 (3일 간 시행). 신속한 채점 및 발표 (1주일 내 완료). 시험관(지공거)의 권한과 책임 강화로 인사 행정의 신뢰도를 높였다.
시험과 채정 과정을 투명하고 신속하게 고침으로써, 당시 귀족 가문들이 시험관에게 압력을 넣거나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크게 억제했다.
● 김치양의 권력 독점과 대량원군 박해(1005년)
신라 왕실의 후손을 자처한 인물로, 뛰어난 외모와 입담으로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외척 세력.
목종이 정사에 흥미를 잃고 남색(동성애)에 빠져 방황하자, 천추태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김치양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김치양은 인사와 재정을 총괄하는 고위직인 우복야 상서에 올랐고, 친위 세력 구축, 대규모 사택을 짓고 권세를 과시하며, 조정 신하들을 위협했다.
1003년, 천추태후와 사통하던 김치양 사이에서 사생아(아들)가 태어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김치양 일파는 자신들의 아이를 차기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몄고,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대량원군을 제거 표적으로 삼았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목종은 1009년 병석에서 군사를 보내 대량원군을 극적으로 구출해 내고 공식 후계자로 책봉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사 지휘관이었던 강조가 군사를 이으고 개경으로 진격하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고, 김치양 일파는 처형당했으며, 박해를 견뎌낸 대량원군은 고려 제8대 국왕 현종으로 즉위하여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된다.
● 유행간의 전횡과 조정의 분열(1008년)
정치에 환멸을 느낀 목종이 유행간을 극진히 총애하며 남색에 빠졌고, 유행간이 국정을 전횡하면서 조정이 완전히 분열되었다.
강조의 군대가 궁궐을 장악하자마자 유행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천추태후의 외척인 김치양 일파와 함께 역적 및 간신으로 분류되어 다른 간신 6명과 함께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다.
● 대량원군(현종) 구출 및 후계 지정(1009년 2월)
김치양 일파가 대량원군을 독살하려 하자, 목종은 침상에서 군사를 보내 대량원군을 궁으로 지켜내고 후계자로 삼았다.
● 강조의 정변 및 목종 폐위(1009년 3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왕이 죽고 김치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가짜 뉴스를 믿고 군사 5,000명과 개경으로 진격했다.
진격 도중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았으나, 처벌이 두려워 그대로 쿠데타를 강행했다.
개경을 장악한 강조는 김치양 일파와 왕의 남색 상대 유행간을 처형했다.
목종을 강제 폐위해 유배 보낸 뒤, 이동 중이던 파주 적성현에서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대량원군이 현종으로 즉위했으나, 거란이 "신하가 왕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제2차 거란 침공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1010년 거란의 40만 대군과 맞선 통주 전투에서 초기 승리에 방심하여 막사에서 바둑을 두다 기습당해 생포되었다.
거란 성종이 "내 신하가 되라"고 회유했으나, "나는 고려인이다"라며 끝까지 거부했고, 거란군에 의해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목종 재위당시 연표

고려 왕 계보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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