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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by [悠悠自適] 2026.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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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출생 1236년 4월 10일 ~ 1308년 8월 7일
재위 1274년 7월 30일 ~ 1298년 3월 9일, 1298년 10월 1일 ~ 1308년 8월 7일(33년 6개월)
가족 부인 6명, 자녀 3남2녀.

생애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의 시호는 몽골의 '충렬왕'(忠烈王), 고려의 '경효대왕'(景孝大王)이다. 
24대왕 원종과 순경태후의 아들이며, 휘는 '심'(諶) 혹은 '춘'(賰)이었는데 군주로 즉위한 후에 '거'(昛)로 개명했다. 
어머니가 제6대 무신 집권자였던 최우의 외손녀였으므로 우봉 최씨 세습 무신정권의 혈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 즉 칭기즈 칸의 후예인 황금씨족 출신 황녀와 혼인한 고려의 첫 번째 왕이다.

제1기 재위 기간 (1274년 7월 30일 ~ 1298년 3월 9일)
1274년 10월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동정을 개시하여 제1차 일본 원정(문영의 역)을 단행함. 
후쿠오카 일대를 공격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퇴각함.
1275년 1월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의 관제가 격하됨. 상서성과 중서문하성이 첨의부로, 관직 명칭들이 한 단계씩 낮아짐.
1276년 3월 충렬왕의 서장자인 소군 왕서가 원나라 숙위 청탁 사건(강수형 사칭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강제 출가당함.

1278년 1월 충렬왕이 전격적으로 변발을 하고 몽골 의복을 입으며 왕실 내 '몽골풍' 수용을 공식화함.
1280년 5월 원나라가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고려에 정동행중서성(정동행성)을 설치함.
1281년 5월 ~ 8월 여·원 연합군이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제2차 일본 원정(홍안의 역)을 감행함. 
이번에도 거대한 태풍(카미카제)을 만나 함선 대부분이 침몰하며 실패로 끝남.
1290년 3월 원나라에 빼앗겼던 동녕부(평양 일대)의 관할권을 충렬왕의 끈질긴 외교 노력 끝에 고려로 반환받음.

1291년 1월 원나라에 반기를 든 카두(합단)의 군대가 고려를 침략하자(합단의 침입), 여·원 연합군이 연기 등지에서 이들을 격퇴함.
1297년 5월 충렬왕의 정비인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가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병사함.
7월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원나라에서 귀국한 세자(훗날의 충선왕)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버지가 총애하던 후궁 시무비를 '공주를 저주해 죽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함(무비 사건). 
이 충격으로 충렬왕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함.

제2기 재위 기간 (복위) (1298년 10월 1일 ~ 1308년 8월 7일)
1298년 10월 즉위 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원나라의 눈밖에 난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다시 국왕으로 복위함.
1301년 4월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를 직할령으로 삼으려 하자, 이 가혹한 개혁안을 막아내고 고려의 사직을 보존함.
1307년 1월 원나라 황실 내부에서 무종이 즉위하는 권력 투쟁이 발생함. 
이때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왕이 무종을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됨.
1308년 8월 충렬왕이 신축궁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 
이후 원나라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충선왕이 다시 고려 국왕으로 복위함.

가족관계(충렬왕 가계도)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장목왕후
성은 보르지긴(孛儿支斤), 이름은 쿠투루칼리미시(忽都魯揭里迷失, 홀도노게리미실)이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복 이후 최초로 맞이한 원나라 공주 출신의 왕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의 딸이고, 거대한 원나라의 권력을 배경으로 삼아, 남편인 충렬왕보다도 고려 궁궐에서 더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고려로 시집오면서 몽골식 머리모양(변발)과 복장, 몽골어 등 '몽골풍'이 고려 왕실과 귀족 사회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성격이 매우 강퍅하고 질투가 심해 충렬왕과 자주 다투었다. 
왕이 다른 후궁을 총애하면 심하게 핍박했고, 왕을 지팡이로 때리거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1297년,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충렬왕이 총애하던 후궁(시무비)이 저주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분노한 아들(충선왕)이 귀국해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 왕장(26대 충선왕)

● 정화궁주 왕씨
충렬왕이 세자 시절에 정식으로 맞이한 본부인이고, 문하시중의 딸로 신분도 높았다.
충렬왕이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딸(제국대장공주)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본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열이 제2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연회 때 제국대장공주가 상석에 앉고 정화궁주는 아래에 앉아야 했다. 
정화궁주가 공주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자, 충렬왕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실질적 장남인 강양공과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강양공은 어머니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동생인 혼혈 충선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 강양공 왕자(王滋)
실질적인 장남이지만, 어머니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던 비운의 왕족.
질투심 많은 제국대장공주가 서열이 밀린 그의 어머니(정화궁주)를 해치려 하자,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고 왕위에 뜻이 없음을 보였다.
정치적 위협을 피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훗날 동생인 충선왕이 즉위한 뒤에야 다시 왕족으로 복귀하여 '강양공'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인 '심왕 왕고'는 훗날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숙부인 충선왕 계열(충숙왕)과 고려 국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 정녕원비(靜寧院妃)
강양공의 친누나.
고려 왕실의 전통에 따라 먼 친척 관계인 왕족 평양공(平陽公) 왕현(王眩)과 결혼했다.
질투와 시기가 심했던 원나라 공주(제국대장공주) 밑에서, 어머니 정화궁주를 닮아 조용하고 온순하게 처신하며 왕실의 풍파를 피해 갔다.

· 명순원비(明順院妃)
강양공, 정녕원비의 친동생.
니와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의 종친인 한양공(漢陽公) 왕현(王儇)에게 시집을 가 아들(계양후 왕광)을 낳았다.
처음에는 언니처럼 '궁주(宮주)'로 책봉되었으나, 어머니 정화궁주가 원나라 공주에게 밀려 서열이 격하되자 그녀 역시 격이 한 단계 낮은 '원비(院妃)'로 불리게 되었다.
질투가 심한 원나라 공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지만, 어머니의 온순한 성품을 이어받아 왕실의 잔혹한 숙청에 휘말리지 않고 1320년까지 조용히 천수를 누렸다.

●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
본래 이름은 김씨(金氏)로, 제국대장공주와 시무비가 모두 죽은 뒤 외로워하던 노년의 충렬왕에게 간택되어 '숙창원비'로 봉해졌다. 
왕의 총애를 무기 삼아 궁궐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충렬왕이 죽은 후, 아들인 충선왕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서모(새어머니)인 숙창원비를 자신의 후궁(숙비)으로 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원나라)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서모들을 아들이 거두는 '취수혼(수혼제)' 풍습이 있었다. 
원나라에서 자란 충선왕은 이를 당연하게 여겨 고려의 유학자들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취했다.
아들의 여인이 된 후 '숙비(淑妃)'로 품계가 올랐으며, 충선왕이 고려를 비우고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고려 궁궐에서 실질적인 안주인 역할을 하며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
1313년, 충선왕이 아들(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로 아주 넘어가 버리면서 그녀의 화려한 시절도 막을 내렸다.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그녀는 1319년(충숙왕 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는 국가적인 예우를 갖추어 치러졌다.

● 시비 반주(盤珠)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최의(崔竩)의 여종(시비) 출신.
충렬왕이 왕태손(세자 이전)이던 젊은 시절, 권신 김준이 최의를 멸한 후 그녀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신분이 너무 낮아 정식 후궁 봉작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시집온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도 반주를 특별히 아껴 궁중에 자주 들르게 했고, 그녀가 낳은 왕서를 '왕소군'이라 부르며 대우해 주었다.

· 소군 왕서(王湑)
충렬왕이 젊은 시절 여종 출신인 '반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들이다. 
'소군'은 신분이 낮은 후궁의 아들을 뜻한다.
서자였지만 원나라 출신 왕비(제국대장공주)의 큰 사랑을 받으며 궁궐에서 귀하게 자랐고 관직도 얻었다.
더 큰 권력을 잡으려고 원나라 군대의 지휘관이 되기 위해 몰래 청탁(뇌물)을 넣다가 부왕인 충렬왕에게 걸렸다.
이 사건으로 1276년에 관직을 빼앗겼고, 강제로 머리를 깎여 승려로 쫓겨나며 정치 인생이 끝났다.

● 후궁 시무비(柴無比)
태인 시씨(柴氏) 가문 출신으로, 원래는 궁인(궁녀)이었다.
충렬왕의 총애를 가장 독차지했던 인물로, 왕이 사냥이나 행차를 갈 때마다 반드시 대동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권력층이 그녀에게 줄을 대며 무비 주변 세력들이 횡포를 부렸다.
충렬왕의 정비인 제국대장공주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급사하자, 어머니의 죽음에 분노해 원나라에서 귀국한 세자(훗날의 충선왕)에 의해 '무당을 동원해 공주를 저주해 죽였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또는 독살)당했다. 
이 사건 직후 충렬왕은 큰 충격을 받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 후궁 김씨(金氏)
사라(沙羅)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김시열(金時悅)의 딸.

주요사건과 인물
● 제1차 일본 원정 단행(1274년 10월)
내용 충렬왕이 즉위하자마자 원나라의 강력한 요구와 압박에 밀려, 김방경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몽골군과 연합하여 일본 규슈 지역 공략에 나섬.
결과 여·원 연합군은 대마도와 이키섬을 함락하고 하카타만(후쿠오카) 상륙에 성공했으나, 전술적 후퇴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야간 폭풍우(태풍)를 만나 함선 상당수가 침몰하며 철수함.
의의 원나라의 대외 정벌에 고려의 인적·물적 자원이 대규모로 강제 동원된 첫 사례로, 향후 고려 백성들에게 엄청난 재정적·육체적 고통을 안기는 신호탄이 됨.

● 고려 관제 격하 및 몽골풍 수용(1275년 1월 ~ 1278년 1월)
내용 원나라의 사위 나라(부마국)가 되면서 1275년 제국 체제의 관제를 부마국 체제에 맞게 낮추었으며, 1278년 충렬왕이 직접 변발을 하고 몽골 의복을 입으며 솔선수범함.
결과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격하되고 왕실 칭호도 낮아졌으며(폐하→전하, 태자→세자), 왕실과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변발, 호복(몽골 옷), 만두, 설렁탕 같은 '몽골풍'이 급격히 유행함.
의의 고려가 원나라의 철저한 간섭과 영향권 아래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조치였으나, 한편으로는 몽골의 직접 지배(직할령)가 아닌 독립국으로서의 왕실 계보는 유지하는 타협책이기도 했음.

● 제2차 일본 원정과 정동행성 설치(1280년 5월 ~ 1281년 8월)
내용 원나라가 1차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고려에 정벌 기구인 '정동행중서성(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0만이 넘는 대규모 여·원 연합군을 편성해 다시 일본 정벌을 감행함.
결과 상륙 후 일본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가운데, 전 군대를 전멸 수준으로 몰고 간 초대형 태풍(일본이 말하는 카미카제)을 만나 군사 태반을 잃고 비참하게 대패함.
의의 두 번의 원정 실패로 원나라의 일본 정벌 야욕은 꺾였으나, 정벌을 위해 설치했던 내정 간섭 기구인 '정동행성'이 정벌 이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는 도구로 남게 됨.

● 동녕부 반환 및 영토 회복(1290년 3월)
내용 무신정권기 배반자들에 의해 원나라 직할령으로 넘어가 있던 동녕부(평양 일대 고구려 옛 땅)를 되찾기 위해, 충렬왕이 부마라는 신분을 활용해 원나라 조정을 상대로 수년에 걸쳐 끈질긴 외교 교섭을 벌임.
결과 쿠빌라이 칸의 승인을 받아 동녕부를 공식적으로 반환받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서경(평양) 지역에 대한 고려의 관할권을 완전히 회복함.
의의 원나라의 간섭 속에서도 국왕의 외교적 역량을 통해 상실했던 국토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되찾은 충렬왕 최고의 치세이자 외교적 성과임.

● 무비 사건과 충렬왕의 1기 폐위(1297년 5월 ~ 7월)
내용 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나라에서 귀국한 세자(충선왕)가 조정을 장악하고 평소 어머니를 핍박하고 아버지를 왕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던 후궁 '시무비' 일파를 처형함.
결과 총애하던 여인을 잃고 정치적 실권을 빼앗긴 충렬왕은 큰 충격과 환멸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남 (충선왕의 제1기 즉위).
의의 고려 왕실 내부의 권력 주도권이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세자(충선왕)에게 급격히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부자간의 깊은 감정적·정치적 앙금의 시초가 됨.

● 조비 무고 사건과 충렬왕의 복위(1298년 8월 ~ 10월)
내용 즉위한 충선왕이 급진적인 반원(反元) 개혁 정치를 펼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권문세족들이 충선왕의 부인(원나라 공주)을 이용해 "충선왕이 다른 후궁(조비)만 총애한다"고 원나라에 모함함.
결과 원나라가 개혁 세력을 숙청하고 즉위 7개월 만에 충선왕을 폐위시켰으며, 상왕이었던 충렬왕을 다시 고려 국왕으로 복위시킴 (충렬왕의 제2기 재위 시작).
의의 고려의 국왕 자리가 고려 내부의 결정이 아닌, 원나라 황실과 몽골 공주의 입김에 의해 마음대로 교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 고려 주권의 뼈아픈 실상임.

충렬왕 재위당시 연표


고려 왕 계보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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