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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by [悠悠自適] 202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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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출생 B,C 38년 ~ 18년(향년 56세)

재위 B,C 19년 9월 ~ 18년 10월(37년 1개월)

가족 부인 5명, 자녀 6남 1녀

 

생애

고구려의 제2대 군주. 평소 사냥을 좋아했고, 재위 중 한나라, 선비, 부여와 대립했다.

몇 안 되는 고구려의 시조 중 하나인 〈황조가〉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던 시절에 부인 예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주몽(동명성왕)은 유리가 태어나기 전에 부여를 떠났고 유리는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

기원전 19년 태자가 된 지 5개월 만에 바로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B,C 18년(재위 2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그리고 이 해에 자신의 이복형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다.

B,C 17년(재위 3년) 10월에 왕후가 사망했고 임금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실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골천 출신의 화희(禾姬), 다른 한 사람은 한나라 출신의 치희(稚姬)였다.

어느 날 유리명왕이 사냥을 갔는데 두 여인이 크게 싸워 결국 치희가 돌아가 버렸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리명왕이 급하게 그녀를 찾아 달랬으나 끝내 치희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 유리명왕이 슬픔을 느끼고 지은 시가 바로 〈황조가(黃鳥歌)〉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B,C 9년(재위 11년) 4월, 신하 부분노의 의견을 들어 선비족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에 공을 세운 부분노에게 식읍으로 포상하려 했으나, 부분노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식읍대신 황금 30근과 말 10필을 하사했다.

B,C 6년 정월, 부여의 대소가 유리왕의 아들인 태자 도절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자, 도절이 이를 거부하였다.

대소가 분노하여 11월 군사 5만을 동원하여 침략했으나 폭설로 병사들이 사망하자 물러났다.

 

B,C 1년(재위 19년) 8월,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탁리와 사비가 돼지를 잡아 다리 힘줄을 끊자 유리왕이 제사에 쓸 제물에 상처를 냈다고 하여 크게 노하여 구덩이 속에 던져 죽여버렸다.

그리고 다음달에 유리왕이 질병에 시달리자, 무당에게 시켜 그들에게 사죄를 하니 병이 나아졌다.

다음해인 서기 1년 태자 도절이 사망했다.

 

2년(재위 20년) 3월, 이번에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신하 설지가 돼지를 잡았는데 유리왕에게 위나암 지역이 길지라고하자, 다음해 10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축조하였다.

12월 유리왕이 사냥을 가서 5일동안 있다가 돌아오자, 협보가 정사를 돌봐야 한다며 충언했다.

이말에 격분한 유리왕이 협보를 파직하자, 협보는 남쪽으로 떠났다.

 

4년, 왕자 해명을 태자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5년, 유리왕이 사냥을 갔다가 겨드랑이 날개가 있는 특이한 사람을 만났는데, 관직과 우씨성을 주고 사위로 삼았다.

8년 정월, 황룡국에서 활을 선물로 주었는데, 태자 해명이 활을 부러뜨리며 활이 강하지 않다고 하자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해 3월 황룡국이 사신을 보내 태자를 만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이 위험하다고 가지말라고 했다.

그러나 해명은 황룡국으로 갔고, 황룡국에서도 위해를 가하지 않고 예로써 맞이하였다.

 

9년(재위 28년) 3월, 유리왕이 태자 해명에게 이웃국가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결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신하가 이미 장남 도절이 자결했는데, 태자 해명은 안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해명은 아버지의 명을 어길수 없다며 여진의 동쪽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해명의 나이 21세였고, 유리왕은 태자의 예로 장사를 지내주고 사당을 세워, 그 지역을 창원이라 불렀다.

 

9년(재위 28년) 8월, 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유리왕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라고 하자, 유리왕은 따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이어린 왕자 무휼(대무신왕)이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사신에게 말했다.

12년 한나라 왕망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정벌하려고 하자 고구려 군사가 거부했다.

유리왕이 강제적으로 그들을 보내자 모두 도망쳐서 도적이 되었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한나라가 고구려에 책임을 씌우고, 고구려 장수 연비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국이라 업신여기자, 고구려와 한나라의 충돌이 심해졌다.

 

13년(재위 32년), 유리왕은 부여가 고구려를 쳐들어오자 왕자 무휼에게 방어하도록 했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 계획을 세워 복병으로 기습하여 부여군을 물리쳤다.

14년 정월, 유리왕은 무휼을 태자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8월, 유리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서쪽의 양맥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18년(재위 37년) 4월, 왕자 여진이 익사했는데, 유리왕이 애통해하며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못했다.

이후 비류사람 제수가 여진의 시신을 찾아오니 왕골령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제수에게 금과 밭을 하사하였다.

10월 유리왕은 두곡의 이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두곡의 동쪽 언덕에서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유리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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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유리왕 가계도)

· 1왕후 송씨

비류지역 송양의 장녀. 입궁한지 1년 3개월만에 사망.

 

· 도절

유리명왕의 맏아들. 부여와의 화친을 위해 인질성격으로 부여로 가기를 거부해 죽음을 택하다.

 

· 2왕후 송씨

비류지역 송양의 딸이자 1왕후의 동생.

 

· 해명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 힘이세고 용맹이 넘쳐 황룡국의 선물인 활을 부려뜨려 유리명왕의 미움을 사고 이로인해 자결을 한다.

 

· 무휼

3대 대무신왕. 대무신왕편 참고.

 

· 여진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 18년 4월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그 충격으로 유리명왕이 병상에 눕고, 그해 10월에 사망한다.

 

· 해색주

4대 민중왕. 민중왕편 참고.

 

· 화희

천 출신의 후궁.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후궁 치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를 쫓아낸다.

 

· 치희

전한 출신의 후궁. 유리명왕의 총애를 받아 화희와 사이가 좋지않아 고향으로 돌아간다.

 

· 재사

후비의 아들로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제6,7,8대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의 아버지.

 

유리명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유리왕은 태자를 두 번이나 바꾸고 아들을 자결시키며, 신하와 불화를 일으키는 등 전체적으로 유리명왕의 치세는 많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는 아직 강성하지 못한 고구려의 국력 때문이기도 했고, 유리명왕 본인의 잘못이기도 하였으며,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기도 하였다.

무려 3명의 아들이 죽거나 자살했다.(도절, 해명, 여진)

유리명왕 재위기간에는 백제는 온조왕, 신라는 박혁거세왕과 남해왕이 동시대에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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