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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by [悠悠自適]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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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출생 4년 ~ 44년(향년 40세)

재위 18년 10월 ~ 44년 10월(26년)

가족 부인 2명, 자녀 2남

 

생애

고구려의 제3대 군주. 휘는 '무휼'이다.

고구려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이자, 고구려 초기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이기도 하다.

유리명왕의 장남 도절태자가 요절하고, 차남 해명태자는 자결하는 바람에 3남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

대무신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영웅호걸스럽고 지략이 있었다.

이후 18년 10월, 유리왕이 사망하자 11살의 나이로 고구려 3대 왕에 올랐다.

 

19년(재위 2년) 수도에 지진이 나서 사면령을 내렸고, 백제인 1천여호가 투항해 왔다.

21년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위해 출병했는데, 키가 9척인 괴유와 마로를 만났다.

괴유와 마로는 부여정벌에 함께 하겠다고 해서 대무신왕이 기뻐하며 허락했다.

 

22년(재위 5년) 2월,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당시 부여의 대소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하였으나 군대가 진흙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지고, 급기야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참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후 대무신왕과 고구려군은 어렵게 부여국을 빠져 나왔다.

고구려에 도착한 대무신왕은 경솔하게 부여를 침략한것을 반성하며, 사망과 부상자들의 가족을 위로하였다.

 

그후 부여는 대소왕이 사망하고 동생은 부여를 버리고 갈사국을 세우고, 7월 대소의 사촌동생이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대무신왕은 그들을 연나부에 살게 하고, 그에게 낙씨 성을 하사하였다.

10월 괴유가 사망하자 북명산 남쪽에 장례를 치뤄주었다.

 

26년(재위 9년) 10월, 대무신왕은 직접 개마국을 정벌하였고,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해 왔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병력을 이끌고 침략했다.

이에 대무신왕은 좌보 을두지와 우보 송옥구의 의견을 듣고 잉어를 바치는 계략을 써서 퇴각시켰다.

32년 3월, 비류부의 수장인 구도, 일구, 분구가 남의 재물을 탈취하고 불법을 저지르자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해 4월, 최리의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이때의 일화이다.

11월, 호동은 계모인 정비의 계략에 빠져 자결하였다.

37년(재위 20년) 10월,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지만, 7년후에 다시 한나라에게 빼앗긴다.

44년 10월, 대무신왕은 생을 마감하였다.

대수촌 언덕에서 장사를 지냈고, 시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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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대무신왕 가계도)

· 왕후

성씨 불명. 2왕후의 아들인 호동에게 모함을 씌우고 후에 자신의 아들을 5대 왕으로 앉힌다.

 

· 해우 1왕후의 아들로 5대 모본왕.

 

· 소후 해씨

부여의 왕족 갈사왕의 손녀. 호동의 어머니.

 

· 호동

대무신왕의 둘째아들이지만 실질적 장남이다. 낙랑국을 정벌하였으나, 왕후의 모함을 받아 자결한다.

 

대무신왕 재위당시 삼국시대 연표

대무신왕은 주변국들을 정복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나 아들 호동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동시대에 백제는 온조왕과 다루왕이 재위하였고, 신라는 남해왕과 유리왕(이사금)이 재위하였다.

 

고구려 왕 계보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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